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프 Sep 15. 2020

2. 엄지발가락 올려놓기


양말에 이어 엄지발가락이라니. 발 페티시가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꽤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럴 의도는 당연히 없었지만.


나는 검지발가락 위에 엄지발가락을 올려두는 것을 좋아한다. 일단 한번 슬쩍 올려두기만 하면 힘을 주고 버틸 필요도, 다시 한번 위치를 정비할 필요도 없다. 발가락이 그렇게 긴 편은 아니지만 짧은 편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습관을 처음 인지한 건 고등학생 때다.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바닥에 뭘 떨어트린 친구가 그걸 줍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가 내 희안한 발가락 꼬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 친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밥이 그렇게 맛있냐? 왜 엄지발가락으로 '최고!'를 하면서 먹어!"


지금으로부터 10년쯤 전의 일이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습관을 충실히 이행 중이니 양말 만지기처럼 참 오래도록 성실하다. (가끔은 발가락 꼬기와 양말 만지기를 동시에 하기도 한다.) 이 또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새에 어디선가 약간의 안정감이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들 뿐.


내게 이런 습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종종 친구들에게 검지발가락 위에 엄지발가락을 올려보라고 시켜보곤 했다. (참고로 남들에게 양말을 만져보라고 시킨 건 손에 꼽는다.) 대부분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지거나, 몇 초 정도 더 버티더라도 불편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발가락에 쥐가 나본 적도 없고, 혼자서 스르륵 풀린 적도 거의 없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의 재능을 묻는다면 '엄지발가락을 검지발가락 위에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걸로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서 양말에 대한 글을 썼다면, 이 발가락에 대한 글은 '내가 잘하는 게 뭘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글이다. 잘하는 것을 꼽는데 고작 엄지발가락을 검지발가락 위에 얹어놓는 것을 이야기하다니 참 시시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처럼 의심 많은 사람이, 그러니까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게 맞는지 혹은 잘한다고 이야기해도 되는지 같은 것들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사람이, 그리고 이 순간마저 이런 걸로 나를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지칭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검지발가락 위에 엄지발가락을 올려놓는 걸 잘하고 좋아한다'는 내용의 글을 태연하게 쓸 정도라면 또 그렇게까지 시시한 인간은 아닌 것 같기도.


아무튼간에 양말 안쪽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거나 검지발가락 위에 엄지발가락을 올려놓는 걸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메세지를 남겨주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 혹독한 세상살이가 조금은 덜 외롭게 느껴질 것 같아서. 우리, 서로를 향해 엄지발가락으로 '최고!'를 외쳐보아요.

작가의 이전글 1. 양말 만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