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간의 큰 위로

-그냥 지나가게 둬요

by 서림

아, 나는 그동안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찬 사람이었던 것인지.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긴 제목의 드라마를 요즘 열심히 보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며 인생 드라마로 손 꼽았던 터라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봐야 할 ‘작품’이었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구교환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대 가득했는지!


그런데 사실, 나는 구교환이 연기하는 ‘황동만’에게 100% 감정 이입을 하진 못한 상태였다. 그가 자신을 억까하며 무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상대로 홀로 고군부투하며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하는 말과 행동거지가 내가 피하고 싶었던 인물들과 매우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별로 이룬 것도 없으면서 남들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남들이 만든 결과물을 난도질하고, 그런 결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 그런 행동과 말을 함으로써 본인은 아주 고귀하고 수준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자위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2, 30대에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기시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황동만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동안의 경험이 만들어낸 편견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장면이 있었으니, 일명 ‘황동만의 피자 배달’ 사건이다. 드라마 속에서 황동만은 옆으로 누워 자고 있고, 동만의 형 황진만은 혼자 술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울리는 배달원의 목소리, “배달이요!” 황진만은 동만에게 배달왔다고 알리지만 동만이는 잠이 들었는지 꿈쩍도 않고, 몇 번이나 황진만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결국 피자값 2만 8천원은 황진만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피자를 상 위에 놓자마자 우리의 동만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피자를 우걱우걱 씹으며 자신의 형인 황진만을 뚫어져라 노려 본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당연히 황동만이 황진만에게 빌붙기 위해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잠든 척 한 거라고 생각했다. 돈은 없지만 피자는 먹고 싶어서 배달을 시켜 놓고는 형이 계산을 하게 하려고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 예상을 여지없이 깬 진실은, 황동만이 사실 가위에 눌려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등을 지근지근 밟고 있는 무언가를 느끼면서 무척이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형이 자기를 깨우면서 발로 차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동만이는 결국 혼자의 힘으로 가위를 물리친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보였던 동만이가, 실제로는 자기 혼자 외로이 가위와 열렬히 싸우고 있었다는 이 사실이 내 머리를 딩, 하고 울리고 말았다.


이것은 코피가 터진 은아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자 들려준 것이었는데, 그걸 보고 나는 내가 얼마나 편견에 휩싸인 인간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 황동만이 벌였던 일명 ‘진상짓’도, 겉으로 보기엔 예의없고 무례하고 개념없는 행동과 말처럼 보였을지라도 그 안에는 혼자 고군분투하는 동만이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거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내면까지 모두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늘 우리는 평소에 생각해 오던 대로만 추측하고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장면에서는 내가 늘 생각해 오던 방식이라는 게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만은 말한다. 가위를 결국 어쩌지 못해서 “그래, 가위 너 이겨. 밟든 뭉개든 마음대로 해라.”라고 생각하니까 당황한 가위는 스르르륵, 사라져 버리더라고. 그러면서 그때 깨달은 게 있다고 말한다.


“아, 상대할 게 있고 상대하지 말아야 될 게 있구나. 가위는 상대할 게 아니었구나.”

그러면서 이어지는 동만의 대사가 은아뿐 아니라, 나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은아씨 힘들게 하는 그거랑 싸우지 마요. 가위 같은 거예요. 상대 안 하면 지나가요. 그냥 지나가게 둬요.“


좁은 방 구석에서 무릎을 세운 채, 낄낄거리며 농담처럼 건넨 동만의 이야기가 이렇게 큰 감동을 줄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코피가 멈추지 않아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던 은아에게도, 동만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나에게도 우리의 천덕꾸러기 황동만은 자기 식의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이전까지 받아왔던 그 어떤 말과 손길보다도 따스하고, 진실됐으며, 깊었다. 아마도 다음 회차부터는 정말 100%로 동만이를 열렬히 응원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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