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하다는 것

by 정짜리

“엄마 무슨 일인데, 왜 자꾸 전화하는데?!”


주말 오후, 아이와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다 아파서 방에 누워있던 남편이 짜증 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림 그리던 것을 멈추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짜증 내고 화내는 건 엄마 담당인지라, 아이도 처음 듣는 날카로운 아빠 목소리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리 모녀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남편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별일 아냐, 아픈데 엄마가 자꾸 쓸데없이 전화해서..’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아내와 딸을 안심시켰다. 아이는 금세 잊고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세상 다정한 남잔 줄 알았는데 자기 엄마한테 저렇게 짜증도 내는 사람이었어...?


딸이자 아내이자 이제 엄마이기도 한 나는 새삼 남편이 괘씸했다. 물론 독감에 걸려서 컨디션이 최악인데, 자꾸 전화하는 어머님이 귀찮고 짜증 나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와이프와 딸에겐 억지로라도 다정하게 구는 것과는 달리 어머님께는 세상 모질게 구는 것이, 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서운했다. 내 아이도 나중에 나한테 저렇게 짜증 내려나 생각하니 조금 서글프기까지 했다.


평소에 싹싹한 며느리 이미지와는 담쌓았던 나지만, 칼바람 부는 통화가 끝나고 속상했을 어머님이 생각나 한 시간 뒤 다시 전화를 드렸다. 남편이 많이 아파서 평소보다 예민하단 말과 함께 잘 돌볼 테니 너무 걱정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어머님이 잠시 뜸을 들이다 ‘전화해 줘서 고맙다’ 하며 전화를 끊는 것이다. 평소답지 않은 아들의 짜증과 평소답지 않은 며느리의 친절이 어머님에게도 다르게 와닿았던 것 같다. 평소답지 않게 내게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오후의 짧은 에피소드로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요즘 나는 부모, 자식, 남편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한결같이 짜증을 낸다. 남편이 지방에 위치한 대학의 겸임교수가 되며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자, 독박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있다. 짜증을 내며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나 자신이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 친절한 아내이자 딸이자 엄마가 되는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밖에선 사람들을 잘 챙기고 다정한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서, 집에 와서는 짜증 폭발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곤 했다. ‘오늘 하루 아이에게 몇 번이나 웃어줬나, 남편의 말에 상냥하게 대답해 준 것이 있나, 그때 엄마한테 툴툴거리지 말걸’ 매일매일을 반성과 자책으로 보내고 있다. 남편처럼 평소엔 다정하다 저렇게 한번 버럭하는 것보단 일관성 있게 짜증 내는 내가 덜 상처를 주는 거야 하며 정당화하고 싶지만, 여전히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며칠 전, 아이 문제로 내가 힘들어하자 엄마는 조용히 듣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OO아, 너 속 많이 상하겠다.”

누구보다 가까운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주니 그 자체만으로 위안이 됐다. 뭘 그런 걸로 머리 싸매고 있냐는 핀잔이 아니라 ‘네가 열심히 한 거 알아, 그래서 속상하겠다’ 라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쉬운 것 같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평소 살갑지 않던 시어머니께 용기 내어 한 일요일 오후의 전화 한 통처럼 나의 친절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간 나도 엄마처럼 나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맘껏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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