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는 에젤드를 부축해 앞뜰에 있는 테이블로 데려다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빵과 치즈, 신선한 채소와 과일 등의 아침 식사가 소담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에젤드는 주춤했으나 하녀가 지체 없이 그녀를 그 앞에 앉혔다.
식기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고 나서 하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에젤드가 입을 열었다.
“저…….”
하녀가 곧 에젤드를 돌아보았다.
“네, 말씀하세요.”
“왕자님과 콜튼 선생님은요?”
“왕자님께서는 일찍 외출하셨고, 콜튼 선생님은 왕진을 가셨어요. 밤낮으로 왕자님만 보살피시는 건 아니니, 틈날 때마다 아이니스와 인근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오늘은 멀리까지 가지 않으셨으니 점심 전에는 돌아오실 거예요.”
“그럼…….”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하녀는 다시 발길을 멈추고 에젤드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만 이렇게 아침 식사를 하는 게 염치가 없어서요.”
하녀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콜튼 선생님은 이미 아침 식사를 하셨고, 왕자님은 원래 드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들도 왕자님의 당부로 차린 것이니, 개의치 말고 편히 드세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혹시나 제가 일하는 분들을 언짢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하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혀요.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하인들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모시는 주인의 태도이지요.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편히 즐겨 주세요.”
하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돌아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된 얼굴로, 에젤드는 치즈를 작은 조각으로 잘라 빵 위에 얹고 한 입을 살짝 베어 물었다. 퍽 맛이 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물오물 빵을 씹는 그녀의 머리 위로 산들바람이 살랑이며 지나갔다. 제법 선선해진 여름날 아침의 바람 한 줄기는 그녀의 머리칼을 살며시 흩어 놓았다. 에젤드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큰 나무의 넓고 무성한 초록 잎들이 머리 위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휘청 고개를 숙일 땐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휘리릭 고개를 뒤로 젖힐 땐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밝히기를 무한히 되풀이했다.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에젤드는 감은 두 눈 위로 비치는 그늘의 검은빛과 햇살의 붉은빛을 번갈아 맞이했다.
감은 눈꺼풀 위로 스치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던 에젤드는 어느덧 눈을 떠 자기 앞의 광경을 눈 속에 담기 시작했다. 테이블 건너편에 외로이 놓인 빈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그 뒤로 보이는 작은 마구간에 눈길을 두었다. 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이 여물을 씹는 소리와 작게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젤드는 고개를 외로 길게 빼고 말을 보려 애썼으나, 먹이 먹기에 너무 몰두해서인지 말은 열린 창밖으로 코빼기도 보여 주질 않았다.
무리해서 일어나기도 쉽지 않은 터라, 에젤드는 마구간에 연연하기보다는 그 왼쪽으로 이어지는 노란 돌담과 짙은 밤색의 나무 대문을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성과 뜰을 빙 둘러 세워진 낮은 돌담을 따라가던 에젤드의 눈은 자신이 하룻밤을 머물렀던 회색 성에서 멈추었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투박한 성은 빨간 지붕으로 덮여 있었고, 대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오면서 바라보는 시선을 기준으로는 ㄱ자 모양으로, 뜰에서 대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에젤드를 기준으로는 그녀의 왼쪽에 L자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L자의 세로획 부분에 해당하는 건물의 본관은 가로획 부분인 동관보다 훨씬 길쭉한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바로 그 공간의 1층에 어제 하루 동안 에젤드가 거쳤던 응접실과 식당, 그리고 그녀가 밤을 지낸 손님방이 있었다. 에드윈의 방은 본관의 2층에 있는 듯했고, 드와이트의 방은 동관에 위치한 듯했다. 본관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두 층이 더 높은 동관의 뒤쪽으로는 아마도 나선형 계단을 감싸고 있을 둥근 탑이 맞붙어 있었다. 또한 에젤드가 등지고 앉은 곳에는 동관과 일직선상에 놓인 아담한 별채도 하나 있었다.
찬찬히 성을 둘러보기를 마친 에젤드는 바삭한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채로 부지런한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며,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도 고독할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쓱싹거리는 톱질 소리는 들리다가 또 멈추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뜰의 한구석을 채웠다. 의자에 앉아 부목을 댄 다리를 다른 빈 의자에 올려놓은 에젤드의 옆에서, 드와이트가 온 신경을 톱 끝에 집중한 채 지팡이의 발 부분을 켜고 있었다.
에드윈이 송골송골 땀이 맺힌 얼굴로 대문을 들어선 것은 그때쯤이었다. 등에는 하얀 천 가방을 모로 메고, 얇은 흰색 상의 위에는 후드가 달리고 어깨만 덮는 짧은 망토를 걸쳐 입고 있었다.
그를 본 하인 하나가 대문을 향해 걸어가서 에드윈이 벗어젖힌 망토를 받아 들었다. 에드윈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자 어제보다 더 심해지고 넓게 퍼진 붉은 염증이 눈에 띄었으나, 하인은 그런 것은 아랑곳도 않는 눈치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이 더우셨지요.”
“고생은 무슨. 그래도 아직 여름은 여름인지라 후드가 생각보다 덥긴 했어. 그래도 어쩌겠나. 이 물어뜯긴 짐승 같은 몰골로 그냥 나갈 수가 있어야지. 그냥 돌아다녔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기겁을 할 텐데.”
“그러니 저희가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내 일이야. 이미 도움을 많이 받았어.”
에드윈은 가슴 앞에 묶인 가방끈의 매듭을 풀며 하인의 뒤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다. 가방을 풀어 손에 들고 그들에게로 다가간 에드윈은 말없이 드와이트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둘 다 지팡이를 자르는 일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에드윈이 온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자르고 길이를 재고, 또 자르고 길이를 재 본 후, 드와이트는 고심해서 재단한 T자형의 지팡이를 들고 에젤드의 곁으로 갔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잠깐 일어나 보세요.”
에젤드는 앉아 있던 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일어섰다. 드와이트가 지팡이를 건네주자 그녀는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섰고, 드와이트는 한 발 물러서 높이를 확인했다.
“된 것 같네요. 불편하지 않은지 몇 발짝 걸어 보세요.”
에젤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에 의지해 발걸음을 떼어 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딱 맞는 것 같아요.”
드와이트는 만족스러운 듯 손뼉을 탁 쳤다.
“좋아요. 며칠, 아니면 몇 주 동안은 그걸 이용하도록 해요. 발목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까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돌려드리지요?”
“그냥 가져요.”
불쑥 꺼낸 에드윈의 말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목발을 짚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에젤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가 덧붙였다.
“어차피 당신 키에 맞추어 자른 것이니 이제 당신 거예요. 내 것은 다시 만들면 되니까.”
“왕자님 것까지 내어 주시고……. 감사합니다.”
에젤드는 다시 한번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고, 드와이트는 두 사람을 갈마보며 사뭇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 모두 그것을 다시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에드윈은 다만 피식 웃고 나서 화제를 돌렸다.
“슬슬 배가 고파지는군. 자, 들어가서 같이 점심을 먹읍시다.”
그가 발을 떼려는 순간 에젤드가 얼른 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감사하지만,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그녀의 겸연쩍은 표정을 보며 에드윈도 얼굴빛을 흐렸다.
“그렇게 말하면 진짜 폐를 끼친 내가 더 미안해지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충분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이 아닌 곳에서 밤을 지낸 것이 처음이라, 귀가가 더 늦어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마차로 데려다줄게요.”
에젤드는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말아요. 그 다리로 숲을 통과하는 건 무리예요. 나뭇가지나 돌멩이라도 잘못 밟으면 큰일 난다고요. 이대로 혼자 보낸다면 눈도 못 뜬 아기 새를 절벽에서 뚝 떨어뜨린 것 같을 텐데, 내가 마음이 편하겠어요?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일지 모르니, 드와이트나 내가 아닌 하녀 한 명이 동행하게 할게요.”
제안을 승낙하겠느냐는 질문을 말로 하는 대신 얼굴에 가득 담고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에드윈의 모습에, 에젤드는 두 입술을 꼭 맞다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답을 얻자마자 에드윈은 하인에게 마부의 집에 가서 마차를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그러고는 곧 다른 하인에게 손짓했는데, 부름을 받은 하인은 성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무언가 두툼한 것이 들어 있는 하얀 주머니를 들고나왔다. 에드윈은 그것을 받아 들어 자신이 들고 있던 천 가방 안에 넣은 뒤 가방을 통째로 에젤드에게 건넸다.
“자, 가져가요.”
“이게 무엇입니까?”
목발 때문에 두 손을 다 쓸 수 없는 그녀를 대신해, 에드윈은 가방을 열어 그 안을 보여 주었다. 에젤드는 슬쩍 목을 빼고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내 눈이 커지고 입까지 벌어진 에젤드를 향해 에드윈이 말했다.
“원래 있던 것에 조금 더했어요. 수요일에 먹는 고기가 오빠들을 더 즐겁게 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하오나 전하, 이렇게 많은 고기를…….”
에젤드가 그를 올려 보았다. 에드윈은 엷은 미소를 띠며 다시 가방을 그녀의 손에 건넸다.
“사과의 뜻으로 받아 줘요.”
일단 가방을 받아 들기는 했으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는 에젤드를 달래려 그가 말을 이었다.
“유배지에서 받는 것치고는 생활비가 많아요. 하인들에게 보수를 주고서도 남는걸요. 어차피 다른 곳에 쓸 일도 많이 없는데, 이런 때에라도 값지게 사용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그럼에도 민망한 표정을 풀지 못하는 에젤드에게, 에드윈은 허리를 숙이고 넌지시 말했다.
“이것으로라도, 다쳐서 잘 걷지도 못하는 데다가 외박까지 하고 제때에 고기도 사 오지 않은 딸을 본 모친의 속상한 마음을 조금은 풀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방을 꼭 쥔 채로 굳어 있던 그녀의 손이 아래로 스르르 떨어졌다. 그 손을 본 에드윈도 마음이 놓이는지 미소를 되찾고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가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고기, 윗마을에서 산 거죠?”
“네, 전하.”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거기에서 사 왔어요. 이 근방에서 그곳 푸줏간 고기가 제일 질 좋고 맛도 좋잖아요. 그럼 화요일마다 그 마을에 가는 겁니까?”
“네, 저희는 그곳에서만 고기를 삽니다.”
“오빠들이 맛을 즐길 줄 아네요. 아, 그렇다면……. 어제 그곳에서 고기를 사서 아이니스로 들어오는 길에 마차에 부딪힌 거군요? 딱 그 지점이 두 마을의 갈림길이잖아요. 헤즈메리 숲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고요.”
“네, 맞습니다.”
에드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다가 또 물었다.
“전에 헤즈메리 숲에 와 본 적이 있어요?”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숲속에 들어와 본 건 처음입니다.”
“헤즈메리 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요?”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럼 나에 대해서는요?”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죠.”
마지막 질문에서만큼은 머뭇거리고 마는 에젤드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에드윈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다 대문 밖으로 마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는 이내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참 반가웠어요, 에젤드.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당신이 이 성에 들어와 준 첫 번째 손님이니까요. 이곳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숲엔 인적이 꽤 드물더군요. 원래 그랬는지 나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음을 느낀 에젤드는 얼핏 동정심이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잘 가요. 다리는 빠른 시일 내에 나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곳 아이니스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 특히 더 크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난 이 숲을 제외하고는 아이니스 영지 내에서 어떤 곳도 돌아다니지 않거든요. 그러니 혹시 우연이 또 허락한다면, 그때 다시 만납시다. 부디 잘 지내요, 에젤드.”
어딘지 모르게 섭섭함이 묻어 있는 그의 작별 인사에 에젤드의 얼굴에도 어딘지 아쉬운 빛이 덩달아 비치었다. 하지만 드러나는 낯빛과는 다르게,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보다는 다만 정중히 예의를 갖출 뿐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서서 대문을 향해 절뚝거리며 걷는 에젤드의 곁에서 에드윈은 천천히 함께 걸었다.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드와이트도 역시 뒤따라 걸었고, 에젤드와 동행할 하녀도 그렇게 했다.
대문을 넘어서기 전 에젤드는 한 번 더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렇게 떠났다. 아니, 떠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