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맙소사……. 당신 정말 모르고 있군요."

by 해린C

대문 밖으로 이제 막 한 걸음이나 떼었을까.


“잠시만요.”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하녀의 음성에 에젤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윈과 드와이트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잰걸음으로 다가온 하녀는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에젤드에게 내밀었다.


“이것, 두고 가시는 겁니까? 혹 빠뜨린 것이 없나 머무신 방 안을 살펴보다가 이걸 보았습니다.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요.”


에드윈의 눈이 하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따라 끌려가듯 움직였다.


종이를 본 에젤드는 그저 무덤덤히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침에 무료하여 서신을 쓰고 남은 종이에 생각 없이 끄적인 것이니 그냥 버려 주십시오.”

“이걸 버리라고요?”


하녀가 되물었지만 그녀의 답은 같았다.


에젤드는 태워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을 주시하는 에드윈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을 사과를 전했다.


“용서하세요, 전하. 제가 허락도 없이 종이와 잉크를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림에 한껏 몰입한 에드윈은 그녀의 말과는 영 다른 질문만을 던질 뿐이었다.


“아니…… 에젤드. 이걸 정말 당신이 그렸어요?”


에드윈은 하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가 눈앞에 가까이 두고 그림을 살폈다. 정중앙에 그려진 원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나뭇잎들과 꽃잎들이 규칙적인 형태를 이루며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고, 원 안에도, 테두리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작은 직사각형 안에도, 다양한 식물의 문양들이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정신없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그림을 살피던 에드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드와이트에게도 종이를 넘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획 돌리고 에젤드에게 또 물었다.


“이런 걸 만들 줄 알아요? 장식화를 따로 배웠어요? 누구에게서?”


에젤드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직접 도안한 것이 아니면 뭐죠? 보고 그렸다는 말입니까? 무엇을 보고?”


어떻게 그것을 모를 수가 있느냐는 눈빛으로, 당연한 것을 굳이 힘을 들여 말하는 양 그녀가 답했다.


“성 안에 있는 장식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성을 말하는 거예요? 아, 손님방에 있는 장식인가? 하긴 내가 그곳에는 들어가 본 일이 거의 없으니……. 거기에 이런 것이 있었던가?”


에드윈은 이제는 드와이트에게서라도 답을 구해 보려는 듯, 드와이트를 바라보며 답이 돌아올 리 만무한 질문들을 던져 댔다.


에드윈이 빠진 수수께끼의 답을 준 것은 결국 에젤드였다.


“아니요. 손님방이 아니라…… 식당에 있는 장식입니다.”


순간 그림을 뜯어보던 드와이트가 고개를 반짝 들었고, 에드윈과 마주 보며 그와 일시에 외쳤다.


“식당에?”




두 남자는 마치 누가 먼저 결승선에 도착할지를 겨루는 경주자들처럼 앞다투어 성의 출입문을 빠져나왔다. 할 말이 어찌나 많아 보이는지, 그들은 중대한 회담이라도 연 듯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열띠게 의견을 나누면서 에젤드가 서 있는 곳까지 반달음으로 걸어왔다.


한발 먼저 도착한 드와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식당에서 봤다는 그것이…….”


한발 늦게 당도한 에드윈이 그의 말을 받았다.


“천장 장식을 말하는 거였어요?”


목발에 몸을 기대어 멀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에젤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렇다고 답했다.


드와이트가 순순히 납득했다.


“사실상 그것밖에는 없었지요.”

“그렇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을 이어 가는 에드윈의 눈에는 어쩐지 눈물까지 고인 듯했다.


“이렇게 정밀하게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에젤드가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었냐는 거야. 그럴 시간이나 있었느냐는 거지. 어제 식당에 내가 먼저 가서 에젤드를 맞았어. 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각에 식당에서 나왔지. 에젤드가 내내 고개를 젖히고 식사를 한 것도 아니고, 모두 잠든 사이 혼자서 촛불을 들고 식당에 가서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아냐. 이건 도저히 불가능해. 이렇게 똑같을 순 없어.”


에드윈은 에젤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설명이 필요해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자신이 무언가 일을 대단히 틀어지게 만든 것인가 싶어, 이번엔 에젤드의 눈에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눈을 몹시도 깜박이면서 에드윈이 요구하는 설명이라는 것을 해 보려 노력했다.


“어, 어제 식당에 들어가면서 천장을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이 성 안에서 그나마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그래도 아직 더 듣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자신의 말에서 집중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에드윈을 위해,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저는 그저…… 어떤 것을 보고 나서 기억에 남으면 그때그때 그림으로 그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작정하고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제가 장식을 모사한 것이 문제가 된다면 지금 당장 그림을 찢거나 태워 주십시오. 부디 없던 일로 해 주십시오.”


에젤드의 말이 이어지고 있던 어느 순간에, 에드윈의 입꼬리에는 희끄무레한 미소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에젤드의 답은 그의 의문점에서 요점이 벗어나 있었고, 아직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기에, 그는 다그치는 것처럼 들리게 하지 않으려 애쓰며 또다시 물었다.


“아무 문제 없어요. 에젤드. 겁먹지 말아요.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사실 너무 많아요. 하지만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장식을 관찰한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느냐는 거예요.”

“말씀드린 대로, 식당에 들어가면서 장식을 보았습니다.”

“그게 다예요?”

“네.”

“그 후로 본 적은 없어요?”

“없습니다.”

“말도 안 돼!”


에젤드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 한 수고가 무색하게도, 에드윈의 입에서는 끝내 참아 내지 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그 말은, 단지 한순간 본 것을 기억하고 똑같이 그렸다는 거죠? 그것도 전날 본 것을 그다음 날에?”


자신의 속에서 속히 답을 끌어내지 못하고 긍긍하는 에젤드를 보고, 드와이트가 대신해서 결론을 내려 주었다.


“네, 전하. 믿기지 않지만 그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드와이트. 우리가 천재를 만난 거야!”

“저도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재를 발견했는지…….”


마치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희귀한 광물을 발견한 사람들처럼 에젤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번쩍이는 눈빛은 그녀를 더욱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더 이상 달뜬 기분을 억누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에젤드의 눈앞에 종이를 펄럭펄럭 흔들며 야단치듯 말했다.


“이런 걸작을 그냥 버리라고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요?”

“정말 그냥 그림일 뿐입니다. 이토록 과찬을 해 주시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과찬? 에젤드, 너무 겸손을 차릴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는 그쯤에서 돌연 말을 그쳤다. 진정으로 꾸중을 듣는 아이처럼 주눅이 든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차렸고, 거짓이라고는 한 치도 섞이지 않은 투명하고 말간 그녀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당신 정말 모르고 있군요.”


에드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누구도 당신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없어요? 가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집안일과 바느질을 하고 가축들을 돌보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할애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 그림을 특별히 눈여겨볼 이유도, 여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매일 그리는 그림을 가족들이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이 얼마나 세밀하게 그리는지도,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고요?”


에드윈은 하늘을 보고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뒤, 에젤드를 설득하여 말했다.


“오늘이라도 한번 보여 줘 봐요. 그동안 그려 놓은 그림들이 있을 것 아니에요.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서 본다면, 분명 우리와 같은 반응이 나올 거예요.”

“아마 남은 그림은 없을 겁니다.”

“뭐라고요?”

“제 그림은 모아 두었다가 요리할 때 쏘시개로 넣습니다. 아마 어제저녁에 다 태웠을 거예요.”

“그림을 모두 태운다?”

“제가 아니었다면 종이와 잉크의 값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라도 소용되게 해야지요.”


에젤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에드윈은 더 이을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엔 보다 못한 드와이트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친구들은요? 친구들이 그림을 보고 해 준 말은 없어요?”

“친구들은…… 제가 그림을 그리는 걸 모릅니다. 상인의 딸이 한가롭게 그림까지 그린다고 하면…….”

“시기와 경멸이 더해지겠죠.”


드와이트는 바로 수긍하면서도 영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이 쑥 빠진 채로 자신을 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젤드는 아무래도 자신이라도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는 화가도, 천재도 아닙니다. 저는 상상하여 지어낼 줄도 모르고, 있는 것에서 빼는 법도, 없는 것을 보태어 꾸미는 법도 모릅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대로 그린다는 것.”


에드윈이 즉각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순간의 기억을 간직해 두고 있다가 그대로 꺼내어 그릴 수 있는 보통 사람은 없어요.”


그는 그림을 양손에 쥐고 에젤드가 그것을 똑바로 볼 수 있게 쭉 펼쳤다.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봐요. 당신이 사실을 그대로 종이에 옮기고 있잖아요. 진실을 베끼는 재능을 가진 거라고요!”

“진실을 베끼는…… 재능이요?”


이제야 에젤드가 어떤 감응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되묻자, 에드윈의 흥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래요. 화가가 그리는 그림만 작품이라는 법이 있나요? 똑같이 따라 그리면 재능이 아닌가요?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이건 분명해요. 에젤드, 당신은 아주 특별한 재능을 지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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