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E에게,
나의 사랑.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이상한 사람이죠.
살면서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면서, 살면서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평범한 사람. 왕족이라는 사람이 자존심도 없이 쉽게 감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쉽게 사과하고, 권위도 없이 툭하면 방글방글 웃고, 체면 차릴 줄도 몰라 스스럼없이 감정을 표현하고, 자기 심사가 뒤틀려 성내기보다는 혹여나 누구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마음을 살피고, 턱을 치켜들고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눈을 바라보며 부탁을 하죠. 그것뿐인가요. 술고래라더니 술 한 방울 마시는 걸 볼 수가 없고, 싸움꾼이라더니 정작 누구 하나 당신에게 맞았다는 사람이 없고, 세상 흉악하다더니 발목 하나 다치게 한 걸로 그렇게나 절절매는,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사람이 또 있겠어요?
그 이상한 사람이 질문은 또 어찌나 많은지. 그렇게 많은 질문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어요. 헤즈메리 성에서의 첫날 말이에요. 나조차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나에 대해 그렇게 긴 설명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니. 그토록 지체 높으신 분을 대하는데도 어떻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하게 느낄 수 있는지, 그런 나 자신이 너무나 의아했죠.
그렇지만 그 낯설기만 한 느낌 때문에 당신을 더욱 피하고 싶었던 걸 알까요. 그렇게 느끼는 건 정상적인 것도, 허용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알 수 없는 기분에 말려들긴 싫었거든요. 차라리 소문과 같은 모습의 당신이었다면 모를까, 소문 같지도, 여느 귀족들 같지도 않은 생소하고 특이한 사람과 엮이게 되는 게 두려웠어요.
하지만 결국은 피하지 못했죠.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연만 깊어지게 된걸요. 그땐 당신이 한 부탁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감히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른 도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그때 내가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에요. 그림 속 당신의 이 모습, 언제나 나를 보면 팔을 높이 들어 흔들던 당신의 이 모습은 당신의 이름, 당신의 존재를 떠올릴 때면 항상 첫 번째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이에요. 세상에 나를 이토록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어땠을까요. 당신을 다시 보지 않고 살게 되었을 내 삶은 힘없이 바스러지는 낙엽보다도 메말라 있었겠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거예요. 내 생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당신이라는 신비로움으로 나에게 일어났으니, 그 어떤 고마움으로도 다 고마워할 수가 없어요. 어두운 밤의 강물처럼 새까만 마음도 투명하게 비추는 달빛 같은 사람. 심연 속에 가라앉은 듯 캄캄하고 암담하기만 한 지금도, 기억 속에 고인 당신의 빛은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저 깊은 바닥까지도 밝혀 주고 있어요. 그립고 또 그리운 나의 사랑. 나도 끝까지 당신 곁을 지킬 거예요. 그러니 굳건하게 버텨 주세요.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마음 깊이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의 사랑,
E
숲길이 끝나 갈수록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했다. 터벅터벅 자꾸만 느려지는 발을 하나씩 겨우 떼는 에젤드의 얼굴에는 근심만 가득했다. 울창했던 나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번에 모습을 감춘 그곳에는 휘넓은 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그날의 그 성이 보였다.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한 에젤드는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주먹을 꽈악 쥔 뒤 긴 숨을 후우 내쉬고 다시 천 근 같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열린 대문 틈으로 보이는 앞뜰이 시야에 더욱 넓고 크게 채워져 들어왔다.
대문 안으로 한 걸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그 한 걸음을 내딛고 막 두리번거리려는 찰나, 반대편 끝에서 나무에 가려져 있다가 벌떡 일어서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달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틈도 없이, 에젤드의 눈은 벽돌을 들고 일어서는 에드윈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 에젤드!”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 문간을 향해 눈을 돌리던 에드윈은 그녀를 보자마자 활짝 핀 웃음으로, 마치 춤이라도 출 사람처럼 벽돌을 쥔 양손을 쭉 뻗어 휘휘 저으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러 댔다.
대문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그는 아직 그녀 앞에 멈춰 서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에젤드! 다리는 괜찮아요? 이제 다 나은 거예요?”
에젤드는 에드윈의 손에 들린 벽돌을 불안한 눈길로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의 눈치를 보며 얼른 시선을 내렸다. 이제 말짱해진 두 다리로 똑바로 설 수 있게 된 그녀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인사한 뒤 대답했다.
“네, 전하. 전하의 보살핌 덕에 아주 말끔히 나았습니다.”
에드윈은 고개를 기웃하여 에젤드의 다리를 흘끔 보고 나서 다시 그녀의 얼굴을 흐뭇하게 마주 보았다.
“걱정했는데, 너무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에요.”
마찬가지로 상처 자국이 흐릿해지고, 피부 역시 색이 얼룩덜룩하고 딱딱히 굳어진 데가 있어 썩 시원치는 않아도 이제는 염증이 꽤 아물어 나름대로 말끔해진 모습의 에드윈이었다. 그는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손에 든 벽돌을 꼭 모아 쥐고 말했다.
“정말 딱 2주 만이네요. 오늘 꼭 와 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기대하지 않으려고 마음 가라앉히느라 혼났어요. 그런데 이렇게 와 주었군요! 고마워요, 정말.”
그의 들뜬 얼굴을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는 에젤드는 그의 눈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고, 에드윈도 그 멋쩍음을 눈치챘는지, 들뜬 마음을 이내 누르고 자신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먼저 작업실을 보여 줄게요. 이리 와요.”
그는 뜰의 막바지에 있는 별채 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별채는 일전에 에젤드가 아침 식사를 했던 야외 테이블의 뒤편에 있었다. 별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춘 뒤, 에드윈은 별채 앞의 빈 공간에 흙을 쌓아 올려 만든 가마로 다가갔다. 아주 작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원통형 가마의 아래쪽에는 사람 주먹 한두 개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아궁이가 뚫려 있어 그 틈으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활활 타고 있는 불꽃이 보였고, 위쪽으로도 뚫린 공간이 있어 그곳으로 연기가 푹푹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드윈은 손에 들고 있던 벽돌들과 주변에 있던 여분의 다른 벽돌들을 그 위에 올려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을 대부분 막고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아궁이 앞에 앉아 얼마의 땔나무를 더 집어넣고 화력을 주의 깊이 살폈다.
에드윈이 장작을 넣고 있는 사이 에젤드는 가마 주변을 눈으로 조용히 둘러보았다. 별채의 처마 밑 한쪽에는 장작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고, 별채 겉벽의 벽돌 사이사이에 박힌 여러 개의 못걸이에는 천 주머니들이 걸려 있었다. 주머니들의 상태는 각기 달라서, 안에 담긴 것에서 물이 새어 나와 흙색의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도 있었고, 이미 다 말라서 겉에 흙물만 배어 있는 것도 있었다. 또한 가마 둘레에는 벽돌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뚜껑이 덮혀 있거나 비어 있는 물통들도 보였다.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진 듯 무릎을 털고 일어난 에드윈은 가마를 위에서 한 번, 아래에서 한 번 더 확인한 뒤, 흙물이 배인 천 주머니 하나를 챙겨 들고는 뒤에 서 있던 에젤드를 돌아보았다.
“자, 이제 들어가죠.”
에드윈이 별채의 문을 열어 손짓을 하자 에젤드는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낯선 첫발을 그 안에 들여놓았다. 들어서자마자 상쾌하면서도 짙은 흙 내음이 물씬 풍겨 와 에젤드는 자신도 모르게 폐부까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별채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고, 크게 난 창문들로 빛이 환하게 들어와 매우 밝았다. 벽의 한쪽 면에는 큰 서랍장 하나가, 나머지 벽면들에는 목재로 만든 진열대들이 있어 그 위에 각양각색의 도자기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는데, 각 진열대마다 성형 후 건조하고 있는 도자기, 유약을 바르기 전 쌓아 놓은 무광의 도자기, 아주 완성되어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도자기 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작업실 구석구석에는 나무 상자들이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물레와 물통, 그리고 그 옆에 갖가지 도구들이 널려 있는 넓고 낮은 작업대 하나와 그보다 좁고 높은 작업대 하나가 붙어 있었다.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는 했지만 눈동자만은 빠르게 움직이며 신기한 듯 공방을 구경하는 에젤드를, 에드윈은 말없이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둘러보기를 마친 듯 에젤드가 에드윈에게 눈을 돌리자 그제야 그가 말을 꺼냈다.
“내 공방에 온 걸 환영해요. 조금 엉성하죠? 제대로 된 시설도, 도구도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당신은 여기에서 주로 작업할 거예요. 여기가 채색을 하는 작업대거든요.”
그가 넓은 작업대 앞으로 가 손으로 그곳을 가리키자 에젤드가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에드윈은 뒤쪽 진열대에서 얇고 판판한 도자기 판 몇 개를 집어 그녀 앞에 툭툭 배열해 놓았다. 도자기를 본 에젤드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살짝 굳어졌다.
“혹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평한 모양으로 미리 만들어 놓았어요. 당분간은 그릇 대신 여기에 그려 보라고요. 굴곡이 없으니 종이에 그리는 것과 비슷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나도 처음 시도해 보는 기법인데, 보다시피 이미 유약 처리가 끝나서 표면이 매끈하죠. 전통 방식으로는 그림을 먼저 그린 후에 시유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정교하게 그리기가 더 쉽다고 해서 한번 해 봤어요. 채색 후에 몇 번 더 구우면 모든 과정은 끝나요. 온전히 완성된 도자기를 보다 보면 어떻게 그려야 할지 조금씩 감이 생길 거예요. 이 중 원하는 크기를 골라서 원하는 만큼,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그려요. 지난번에 부탁한 것처럼, 종이에 그릴 그림을 대신 도자기에 몇 점만 그린다고 생각하면 돼요. 보통 그림은 펜으로 그리나요?”
“보통 펜으로 그리고, 가끔 흑연으로도 그립니다.”
“잘됐네요.”
그는 서랍을 열어 그 안에서 나뭇조각 사이에 흑연을 끼워 만든 연필 몇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또 물었다.
“물감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고 했죠?”
“네. 아버지께서 파시다가 남은 안료로 만들어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서랍에서 형형색색의 안료가 담긴 함, 액체가 담긴 소호들, 유발과 막자, 그리고 다양한 굵기의 붓들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도자기용은 좀 다를 거예요. 재료를 배합하는 법은 알려 줄 테니 스케치가 끝나면 말해요. 색깔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쓸 수 있어요. 더 필요한 색깔이 있으면 알려 줘요. 지나치게 비싼 것만 아니면 가능한 대로 구해 볼게요. 채색과 관련된 모든 작업은 당신 소관이에요. 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뭐든 당신 뜻대로 하고 당당하게 요구해요.”
설명을 모두 마친 뒤 에드윈은 에젤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에젤드는 일언반구 없이 떨리는 숨만을 길고 나지막이 뱉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인지, 에드윈은 그녀가 입을 뗄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전하…….”
마침내 에젤드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공들여 만드신 것들을 제 그림 때문에 망칠까 두렵습니다.”
에드윈은 그저 씨익 웃고는, 맞은편에 있는 진열대에서 완성된 도자기 하나를 가져와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봐요. 이보다 더 망칠 자신이 있어요?”
에드윈이 보여준 도자기에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렸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서툰 솜씨로 그려진 검은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 말을 멋지게 그려 보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다고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이상은 불가능했어요.”
애초에는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말의 갈기를 그리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그저 우악하게 쏟아지는 폭포처럼 제멋대로 쭉쭉 그려진 갈기와 지나치게 큰 말의 콧구멍을 본 에젤드는 혹여 웃음이 새어 나올까 두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재빠르게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다행히 잘 참아 냈는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내 도자기들을 완성시켜 줄 사람이 꼭 필요했어요. 멋진 그림을 좀 넣고 싶은데, 스스로 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번번이 실망스러워서 언젠가부터는 아예 도기화 작업은 빼기 시작했거든요. 스승님도 포기하신 그림 실력이니 뭐, 말 다 했죠. 그런데 당신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거예요. 그것도 내 시시한 도자기를 꾸미기엔 넘치도록 과분한 재능을 가진 당신이.”
에드윈을 보고 있던 에젤드는 민망함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도자기는 원래 여러 번 실패하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나도 도제 생활을 할 때에는 처음부터 잘되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은 도자기를 허무하게 파기해야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결국 7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혼자 힘으로 도자기 하나 정도는 완성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잖아요. 시간이 필요하죠. 나는 완벽을 바라는 게 아니라, 완성을 바라는 거예요.”
에젤드의 눈빛에는 일말의 의아함이 어렸지만, 그녀는 일단 말뜻을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신이 난 에드윈은 곧바로 구석에 박혀 있던 의자 하나를 가져와 에젤드의 옆에 놓아 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생각 못 했겠지만, 당신이 그린 그림을 오히려 내가 망칠 수도 있어요. 아까 말했듯이 이건 나도 처음 시도해 보는 방법이니까요. 동방의 나라들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기법인데, 이곳에서는 그 기술을 모방한 역사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나도 스승님이 제안해 주셔서 이제서야 해 보는 거예요. 스승님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당신 그림 솜씨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이 방법을 권유해 주셨어요. 결론은, 우리 둘 다 걸음마 수준이니 부담 가질 것 없다는 말이에요. 실패는 물론이고 실수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흑연은 구울 때 날아가고 물감은 지울 수도 있다고 하니까요. 자, 이제 이 정도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것 같은데, 각자 일을 시작해 볼까요?”
에젤드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먼저 앞치마 위의 허리끈에 달린 두루주머니에서 머릿수건을 꺼내어, 밑으로 내려 묶은 긴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감쌌다. 그런 다음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앞에 놓인 도자기 판들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이윽고 작정한 듯 그중 하나의 크기를 선택해 앞으로 끌어당겨 놓고 잠시 생각한 뒤 연필을 집어 들었다. 에드윈은 눈길을 주지 않는 척하며 그녀가 선을 그려 나가는 것을 흘깃흘깃 보다가, 밖에서 가지고 들어온 천 주머니에서 수비를 끝낸 후 물기를 뺀 점토를 꺼내어 높은 작업대에 놓고 그 앞에 서서 반죽을 치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란히 자리한 두 사람은 단단한 도자기를 딱딱 두드리는 연필 소리와 흙덩이를 척척 치대는 소리로 공방 안을 조금씩 채워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