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왕자가 웬 도자기를 굽나 싶겠죠. 내가 할 줄 아는 것도 많이 없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라서 그래요. 지금은 처우가 많이 좋아져서 성에서 하인들도 거느리며 지내고 있지만, 내 첫 번째 유배지는 도자기 장인의 집이었어요. 스승님은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여 도제를 양성하는 분이셨는데, 옛날처럼 엄격한 규율이 없으니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소년들을 웬만하면 내치지 않고 다 제자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직인이며 도제며 할 것 없이 왁자지껄하게 어울려 지내는 그런 곳이었죠. 그 집에서 살게 된 이상 나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렇게 민가로 귀양을 가는 경우에는 어떠한 경제적 지원도 없이 오직 내 스스로의 힘으로 밥값을 해야 해서,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도제 생활을 하며 스승님을 시중들고 일을 배워야 했죠. 스승님은 엄격하고 무뚝뚝하긴 해도 인품을 갖춘 분이셨어요. 그 덕에 첫 귀양살이에도, 낯선 바닷가 생활에도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왕자이자 죄인인 편치 않은 신분임에도 다른 제자들과 막역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분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고요. 방해해서 미안한데, 거기 그 넓적하게 생긴 칼 좀 줄래요? 고마워요. 부친께서 무역상이라고 했으니 레이츠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으려나?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 말이에요.”
“네. 드물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배를 타러 레이츠로 간다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 그럼 부친과 내가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스승님이 부둣가로 물건을 납품하러 가실 때 자주 따라갔었거든요. 부둣가는 아주 별세계였어요. 찝찔한 바다 냄새와 소금기가 온몸을 휘감고, 갈매기 울음소리는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들려왔죠. 무역선이 드나드는 시간이 되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방방곡곡의 상인들이 오다니고, 물건을 거래하며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수많은 외국어를 듣고……. 그곳에서 스칸디아어를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왕궁에서 배웠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는 다 잊어버렸는데, 오히려 북쪽 왕국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배운 스칸디아어 실력만 늘었죠. 그곳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런,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나요? 부친께서는 배를 타시니 집을 비우는 일이 아주 잦겠네요. 가족들은 평안한가요?”
“네, 전하. 나라님의 은덕에 모두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보통 무역상들은 항구나 그 근처 도시에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산골 마을에 살면 불편하지 않아요?”
“맨 위의 두 오빠와 언니는 세쌍둥이입니다. 그 뒤로 언니 한 명이 더 태어난 이후에 아버지께서 무역 일을 시작하셨는데, 아이들 넷을 데리고 이미 자리 잡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을 어머니께서 부담스러워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쭉 아이니스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차로 이동하면 오래지 않아 서항에 닿을 수 있으니 아버지 사업에도, 저희 생활에도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세쌍둥이라니, 당신에게서는 참 흔치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군요. 양친께서 몹시 다망하셨겠습니다.”
“예, 두 분 다 고생이 아주 많으셨고, 사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쌍둥이 혼사를 한꺼번에 치르려고 많이 고투하고 계시거든요.”
“한꺼번에 혼인을 한답니까?”
“부모님이 그걸 원하시는데, 아직은 신붓감과 신랑감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그럼 당신도 꽤나 수고할 일이 많겠군요. 집안일을 거들 다섯 자녀 중 세 명이 다른 일에 정신을 쏟고 있으니, 해야 할 일이 두 배로 늘었겠어요.”
“그래도 저는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심부름을 주로 하는 편이라서, 오늘처럼 다른 마을까지 가는 날에는 잠시 바람을 쐴 기회도 있습니다.”
“그런 황금 같은 기회를 혹시…… 내가 빼앗고 있는 건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화요일에는 좀 더 멀리 나가는 대신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전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됩니다. 여유가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정말이죠? 에젤드, 크게 바라지 않아요. 화요일 아침나절에 잠깐만 와서 딱 한 점만 그려 주고 가도 좋아요. 물론 당신만 이 일이 괜찮다고 하면 화요일이든 다른 날이든 언제든지 와도 돼요. 나는 아침에는 거의 항상 성에 있으니 어떤 날 아침에 오든 상관없어요. 혹시 내가 당신을 고용하길 원한다면 그것도 해 줄 수 있어요.”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상인이 아니시니 도자기를 팔아 수익을 내시는 것도 아닐 텐데, 제가 어찌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겠습니까. 그저 제 작은 손을 보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무슨……. 황송한 건 나죠. 그럼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좀 받을게요.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성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용하고 음식도 실컷 먹어요. 쉬고 싶을 땐 뜰에서든 실내에서든 마음껏 쉬어요. 집처럼 생각하고 편히 머물러요. 다만 바라는 것은,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신에게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아 그런데,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된 거예요? 듣자 하니 부모님이 재능을 알아보고 교육을 시킨 것도 아니던데…….”
“어렸을 때 저는 기억하는 것을 모조리 다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저는 막내인지라 언니 오빠들과는 함께 어울리는 시간도 별로 없었기에, 어머니 옆에서 종알댔지요. 하지만 그것을 다 들어 주는 건 어머니께 너무나 벅찬 일이었고, 결국 제 이야기를 듣다가 지치신 어머니는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쓰든 그림으로 그리든 하라며 종이와 펜을 사 주셨어요. 그때는 오빠들에게 글을 다 배우기 전이라서 저는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눈앞에 선하게 나타나는 형상들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하니 머릿속의 기억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어느 순간 그림이 저의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당신은 눈으로 본 것은 전부 다 기억하나요? 어렸을 적 기억까지 모두?”
“그건 아닙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저절로 떠오르지만, 그 밖의 것은 일부러 떠올리면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사라진 것도 많습니다. 몇 년 전에 본 것이라면 노력을 해야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선명히 기억이 나고요?”
“네.”
“그게 특별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제 기억은 저와 가족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보아 주시는 것이지요.”
“아니, 내 생각엔 그 반대인 것 같은데요. 당신의 기억은 특별한 것이지만, 당신과 가족들에게만 성가신 것뿐이에요. 보장컨대, 당신 같은 사람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는 그 어떤 저명한 화가들 중에서도 찾을 수 없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매우 쓸모 있는 것을 하등의 쓸모도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지금 그린 이 그림도…… 오, 이야……! 에젤드! 너무 아름다워요. 이거 봐요! 그렇게 걱정을 하더니, 순 엄살이었네. 이곳은 어디죠?”
“오늘 아침 집 앞에서 본 풍경입니다. 길가에 핀 풀꽃들과 색이 변해 가는 나뭇잎들이 아주 예뻤습니다.”
“정말 그렇네요. 아주 예뻐요. 늘 궁금했는데, 아이니스가 이런 마을이었군요. 당신 덕분에 이렇게라도 마을 구경을 하네요. 와……. 너무 기뻐요! 그런데, 왜 이 부분만 비어 있어요?”
“그 부분은…… 제가 기억하는 색과 맞는 안료가 없어, 무엇으로 대신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색을 찾고 있었는데요?”
“아주 노란색도 아닌 것이, 아주 붉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황색도 아니고…….”
“아주 노란색도 아닌 것이, 아주 붉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황색도 아닌……. 잠깐, 그런 색깔의 안료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번 따라와 볼래요? 서재에 쓰지 않는 안료를 모아 둔 곳이 있어요. 어서 나와 봐요.”
“아, 네……. 어, 어어!”
쨍! 하는 소리에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이미 공방 문을 나선 에드윈과 아직 공방 문턱을 넘지 못한 에젤드는 둘 다 몸이 굳은 채 바닥에 깔린 도자기 파편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에드윈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에젤드가 황급히 몸을 낮추어 바닥에 철퍽 엎드렸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에드윈의 시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그녀의 등에 쏠렸다.
“에젤드, 하…….”
그의 한숨은 퍽 개탄스럽고 묵직했다. 그 소리에 에젤드는 더 낮출 것도 없는 머리를 더욱 조아려 이제는 그 이마에 바닥의 흙이 다 묻을 지경이었다. 에드윈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이내 꾹 참아 내고 잠시 숨을 골랐다. 침묵 속에서 에젤드가 느낀 에드윈의 분노는 그녀를 몹시도 불안하게 했기에, 그저 숨을 죽이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진 그의 말은 이러했다.
“발목 아껴요.”
바닥을 향했던 그녀의 얼굴은 순간 멍해졌고, 이윽고 서서히 머리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 속에는 에드윈의 냉랭한 얼굴이 들어왔다. 에드윈은 고개를 까딱하며 차가운 눈빛을 그녀의 발목으로 보냈다. 에젤드는 그가 가리키는 자신의 발목을 돌아보았다. 너무 다급했던 나머지 채 펴지도 못해 잔뜩 꺾여 구부러진 자신의 발목을.
에드윈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아직까지 보인 적이 없었던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며 그가 말했다.
“일어나요.”
그의 눈빛에 위축된 에젤드는 고개를 떨구었지만, 이어지는 그의 침묵에 곧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변함도 없는 눈빛으로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춘 그가 또 말했다.
“제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느낀 에젤드는 한껏 졸아든 마음을 안고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후에야, 에드윈도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 섰다.
에젤드를 앞에 세워 놓고도 아무 말이 없는 그는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동료예요. 동료끼리 이렇게 대하면 불편해요. 이런 사소한 일 하나에 마음고생 시키려고 와 달라고 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냉기가 가신 그의 목소리에 안심을 해서일까. 용기를 내어 에드윈을 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진 듯 보였다.
“그리고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공방에서 도자기가 깨지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게다가 그걸 거기에 놓은 건 나였어요. 내 불찰이었어요. 그런데 용서는 당신이 구했죠.”
잠시 말을 멈춘 에드윈은 에젤드의 두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본 뒤 진지하게 물었다.
“나를 계속 두려워할 건가요?”
에젤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피했다.
“당신이 느끼는 것까지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지만…….”
그는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담아 말했다.
“함부로 자세 낮추지 말아요, 에젤드.”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 에젤드를 보며 에드윈이 물었다.
“그건 할 수 있죠?”
확신에 차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표정으로, 에젤드는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네……. 전하.”
“좋아요.”
비로소 자기 자리를 떠났던 에드윈의 미소가 다시 그의 입꼬리에 맺혔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에젤드의 등 뒤에 있는 깨진 도자기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가가 큰 파편 하나를 주워 올렸다. 그는 그것을 에젤드의 눈앞에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얼굴은 남았네요.”
몸통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온전히 살아남은 말의 얼굴이었다.
“우리 잉그램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아직…….”
“그럼 이것 먼저 치우고 같이 가서 봐요. 아주 순하고 예쁜 녀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