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에게는 대단한 일이에요."

by 해린C

에드윈은 말에게 굴레를 씌워 마구간에서 데리고 나왔다. 윤기 나는 까만 털을 가진 말은 에드윈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걸어와 에젤드의 옆에 얌전히 섰다. 말의 등이 자신의 어깨보다도 높은 것을 본 에젤드는 다소 위압감을 느끼는 듯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반대로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쓰다듬던 에드윈은 멀찍이 서 있는 에젤드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 봐요.”


에젤드는 쭈뼛거리면서도 곧 에드윈의 권유대로 말의 얼굴 앞으로 가까이 가 그 크고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니 쑥스러운 모양이에요.”


에드윈이 앞뒤로 쫑긋쫑긋 바쁘게 움직이는 말의 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부친께서 마차를 이용하시니, 말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겠네요?”

“아니요. 마차와 말을 관리할 형편까지는 못 되어, 아버지는 전세 마차를 이용하여 여행하십니다.”

“그럼 당신도 잉그램이 낯설겠군요. 하지만 잉그램은 아주 착해요. 걱정 말고 이렇게 한번 만져 봐요.”


에드윈은 잉그램의 콧등을 서너 번 쓸어 주고는 곧 손을 거두고 에젤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에젤드는 그가 했던 대로 손을 뻗어 잉그램의 콧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포근하고 보드라운 털에 처음으로 손길을 준 에젤드의 눈은 금세 초롱초롱 빛났고, 그렇게 그녀는 신기한 듯 몇 번이고 더 잉그램을 쓰다듬었다. 에젤드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애정이 스며 나와 곁으로 번져 가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윈의 미소 역시 환하게 피어올랐다.


“빨리 친해지겠는데요?”


에젤드가 잉그램을 연신 쓰다듬는 동안 에드윈이 이어 말했다.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내 부탁 들어준다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걸 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첫날부터 무리하면 안 되니까 오늘은 그림 한 점으로 마무리하는 걸로 해요. 아까 말한 그 안료는 한번 찾아 볼게요.”

“감사합니다. 사실…….”


에젤드는 부끄러운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씹었다. 하려던 말을 꺼내기가 영 쑥스러운지 그녀는 머릿수건을 벗으며 시간을 끌었다. 에젤드를 빤히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에드윈의 상체는 궁금함에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망설임 끝에 꺼낸 에젤드의 말을 듣자마자 앞으로 기울던 에드윈의 몸이 놀란 듯 뒤로 젖었다.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그가 감탄하여 말했다.


“정말요? 와, 에젤드……. 고마워요! 괜히 나 때문에 어려운 걸음 한 건 아닐까 싶어서 솔직히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는데, 그 말을 들으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네요. 다음에는…….”

“아, 아이코……!”


에드윈이 말을 잇고 있는 와중, 에젤드는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잉그램의 힘에 밀려 비틀대며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에드윈이 매우 우습다는 듯 몸을 들썩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웃어 댔다.


“당신이 꽤 마음에 드나 보네요.”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다시 마구간으로 바삐 들어간 그는, 그 안에서 안장과 등자를 가지고 나와 잉그램의 등에 얹으며 물었다.


“한번 타 볼래요?”


에젤드가 대답도 채 하기 전에, 그는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가져다가 잉그램의 옆구리 아래에 놓고 그 위를 탁탁 치며 말했다.


“이걸 밟고 올라가서, 여길 이렇게 잡고, 왼발을 등자에 껴 봐요.”


당황한 에젤드가 그저 망연히 서 있기만 하자, 그는 몸소 의자 위에 올라가 자신이 설명한 대로 대강 시범을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내려와 땅을 밟고 선 뒤 에젤드를 재촉했다.


“타 봐요, 한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왕자님의 말을 타겠습니까.”

“그 왕자가 직접 제안하는 거잖아요. 말 주인이 된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혹시 별로…… 내키지 않아요?”


선뜻 그렇다고는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에드윈이 다시 한번 슬쩍 권했다.


“그런 게 아니면 한번 타 봐요.”


그 제안이 아주 싫지는 않았던 듯, 앙다문 입술 끝자락에 호기심이 깃든 미소를 은근하게 띤 채, 에젤드는 에드윈이 했던 대로 조심스럽게 의자를 밟고 올라가 잉그램의 등 위에 올라탔다.


“좋아, 잘했어요. 이제 이걸 이렇게 잡아 봐요.”


에드윈은 고삐 잡는 법을 자기 손으로 보여 준 뒤 그것을 에젤드의 손에 넘겼고, 그녀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고삐를 잡았다.


이제 에드윈은 잉그램의 턱 바로 밑의 고삐 끝부분을 쥐고 몸을 대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자, 이제 가 볼까요? 숲 어귀까지 바래다줄게요.”

“어? 자, 잠시만요!”


단 반걸음밖에 움직이지 못한 잉그램을 급히 세우고, 에드윈은 얼른 고개를 들어 에젤드를 올려 보았다.


“왜요?”

“안 됩니다!”

“뭐가요?”

“저는 그냥 한번 타보기만 하라는 말씀이신 줄 알고……. 하지만 이렇게 가는 건 안 됩니다.”


에젤드는 몸이 달아 보였으나, 에드윈은 그저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뭐 그렇게 안 되는 게 많아요?”


그러나 울상을 하고선 안절부절못하는 에젤드를 계속 보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그는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다시 물었다.


“말이 움직이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내가 밑에서 끌고 가는 게 미안해서 그런 거예요?”

“둘 다……입니다.”

“흠…….”


에드윈은 검지로 입술을 누르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잉그램의 목덜미를 쓸며 그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미안해. 오늘만 실례할게.”


그런 다음 아직 같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 에젤드의 뒷자리에 훌쩍 올라앉고는 말했다.


“이러면 괜찮죠?”




조로롱조로롱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스적스적 나뭇잎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숲길 사이로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걷는 말 위에서 긴장감에 허리를 꼿꼿하게 편 에젤드는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눈빛으로 오롯이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흔들거리며 앉아 있던 그녀는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과 잔잔한 새소리에 서서히 안정을 찾게 되었는지, 어느 순간 고개를 살짝 틀고는 높게 떠 있는 자신의 다리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고삐를 꼭 쥔 자신의 손을 한 번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조금 더 용기를 얻은 모양으로, 이제는 반대편으로 또 한 번 고개를 살짝 틀어 자신이 쥔 고삐의 뒷부분을 잡고 있는 에드윈의 손을 흘끔 보았다. 그 손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고, 바로 그때 에드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와서 닿았다.


“긴장 풀고 주위를 좀 둘러봐요. 내가 잘 잡고 있으니 걱정 말고.”


그의 말이 어떤 안도감이라도 준 것일까, 에젤드는 마치 수북이 얹힌 근심을 내려놓듯 잔뜩 올라갔던 어깨를 스르르 내리고는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새파란 하늘과 그 안의 하얀 구름들, 그리고 어느덧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물든 채 너울거리고 있는 연둣빛 나뭇잎들이 모두 그녀의 눈동자에 하나하나 들어와 비쳤다.


“천천히 갈 테니 느긋하게 봐요. 나는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을 방법을 찾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앞으로도 이 숲길에선 말 타고 편하게 다녀요.”


순간 풍경에 취해 있던 에젤드가 화들짝 놀라 입을 뗐다.


“안…….”

“안 된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해요.”

“제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요.”

“크든 작든 누군가 나를 위해 수고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 여기까지 걸어오는 수고라도 덜어 주면 당신은 다리가 편하고, 나는 마음이 편하고,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어어…… 어어?”


이번엔 에드윈이 아니었다. 저 멀리 눈앞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려오던 노랗고 여린 나뭇잎이 에젤드가 가까워 오자 마치 약을 올리듯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며 정신을 쏙 빼놓아 그녀의 말을 막은 것이었다. 나뭇잎은 현란한 묘기를 보이고는 길쭉한 잎자루를 그녀의 머리칼 사이에 콕 박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드윈은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에젤드의 몸짓에 하하하고 웃었다. 너무도 가까운 등 뒤에서 온몸을 울리듯 들려오는 에드윈의 웃음소리에 더욱 부끄러워진 에젤드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다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 숨을 멈추었다. 에드윈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나뭇잎은 미련이 남은 듯 잎자루 끝으로 에젤드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건드렸다. 건드린 것은 나뭇잎인데, 에젤드의 얼굴은 단풍처럼 빨개졌다.


에드윈이 떼어 낸 나뭇잎은 빙글빙글 날아 에젤드의 눈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아득해진 시선은 바람에 흐르는 나뭇잎이 오른쪽으로 한 번, 또 왼쪽으로 한 번 날아올랐다 떨어지길 반복하다가 마침내 땅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까지 그것을 좇았다. 에드윈도 같은 것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 줄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땅 위에 떨어진 나뭇잎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돌아보며, 에드윈이 말했다.


“그리고 에젤드, 나에게는 대단한 일이에요.”


에젤드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내려고 조금 전의 이야기를 되짚는 듯 그녀는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곧, 누군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잠이 깬 사람처럼 새맑아진 눈을 깜박였다. 아무 말이 없는 에젤드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오른 것을 에드윈은 알지 못했다. 그때에 불어온 선들바람에 홀연 떨어져 내린 노랗고 여린 나뭇잎 하나가 자기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에젤드는 바쁜 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아직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서두는 걸음으로 부엌문부터 열고 들어간 그녀는 먼저 장을 봐 온 식재료를 기다란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장작불이 타고 있는 화덕으로 다가가 고리에 걸린 솥단지의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한 다음, 조리대에서 병에 담긴 우유를 가져와 솥에 쏟아부은 뒤 화덕 한구석의 장작더미에서 장작개비 몇 개를 집어 불에 넣었다. 그러고도 불땀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벽 선반 위에 쌓아 놓은 종이를 집어 구기기 시작했다. 종이 뭉치에 불을 옮겨 붙이려던 순간, 잠시 멈칫한 에젤드는 구겼던 종이를 다시 스르륵 펼쳐 보았다.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중 한 장을 뺀 나머지 종이를 다시 구겨 불을 붙였다.


땔감 신세를 면한 종이 한 장을 들고, 그녀는 부엌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테사.”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를 뒤에서 불러 세운 중년의 여인은 에젤드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 다녀왔어요, 어머니.”

“그건 뭐니?”


에젤드의 어머니는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림이에요.”

“그걸 왜 도로 가져가니?”


에젤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외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건 책상 위에 있었는데, 누가 부엌에 갖다 놓았어요?”

“내가.”


에젤드는 어머니 대신 대답하며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여인을 건너보았다. 에젤드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여인이 말을 이었다.


“거기 있은 지 벌써 한참이나 됐는데 계속 굴러다니길래 내가 갖다 놓았어.”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눈 속엔 궁금증을 가득 담은 채로 에젤드가 여인에게 물었다.


“이 그림을 봤어?”


여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귀찮은 듯 대꾸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봤으니까 가져다 놓았지.”


에젤드는 잠시 동안 조용히 그림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건 태우는 용도가 아니에요.”

“그럼 무슨 용도인데?”

“이건 그냥…….”

“아이고, 테사!”


어머니가 다짜고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죽이 다 눌어붙겠다. 어서 가서 저어라. 넌 이리 와서 나 좀 돕고.”


에젤드는 주저할 틈도 주지 않고 뒤돌아서 총총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저 담담히 쳐다보고만 있다가, 이내 다시 종이로 시선을 옮겨 거기 그려진 그림에 오랜 눈길을 주었다.


선명한 검은 선으로 그려진 헤즈메리 성의 천장 장식 그림은 더 이상 책상 위에서 하릴없이 굴러다니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는 방의 한쪽 구석에 놓인 옷궤 안 가장 밑바닥에서, 겹겹이 쌓인 옷가지들의 무게를 견디며 가만히 숨을 죽인 채로 세상에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감추어져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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