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가 정신없이 달린다. 울퉁불퉁한 벽돌 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무릎까지 들어 올린 적갈색 치마가 펄럭거린다. 주변으로 말굽과 마차 바퀴, 해어진 앞치마와 길게 늘어진 비단 치맛자락, 낡은 가죽신과 매끈한 구두 들이 빠르게 스쳐간다.
두 다리는 한참 동안 벽돌 길을 달려 이윽고 자갈과 흙이 뒤섞인 길에 들어선다. 흰 서리가 내려앉은 흙길 위에 발자국이 서둘러 찍힌다. 어린 여인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하나둘 수가 늘어나던 주위의 높다랗고 앙상한 나무들이 어느새 다닥다닥 어깨를 나란히 하여 숲을 이룬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두 다리가 멈추어 후들거린다.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양쪽 무릎을 짚은 채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크게 터뜨리자 하얀 입김이 훅 뿜어져 나온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큰 숨을 몰아쉬더니, 이래선 안 된다는 듯 이내 고개를 젓고 여인은 다시 뛰기 시작한다.
숲을 지나니 어느덧 사방이 탁 트이고, 눈앞에 노란 벽돌담이 가까워진다. 그리 높지 않은 벽돌담 너머로 빨간 지붕이 덮인 ㄱ자 모양의 소박한 잿빛 성이 보인다. 바삐 달리던 두 발이 그 앞에 급히 멈추어 서고, 여인은 굳게 닫힌 나무 대문을 힘차게 두드린다.
“선생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소리를 내려는데 차오르는 숨 때문에 마른기침만 나올 뿐이다.
여러 번 기침을 하던 여인은 숨을 꾹 참고는, 더욱 힘을 주어 문을 두드린다.
“콜튼 선생님!”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인은 절망한 듯 웅크려 앉는다.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에젤드?”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여인이 몸을 일으켜 돌아본다. 짙은 색 코트를 점잖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가 참담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여인이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두 팔을 꽉 붙잡는다.
“콜튼 선생님!”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전갈을 보내셨잖아요. 왕자님께서 체포되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남자의 깊게 그늘진 눈빛에 슬픈 기운이 더욱 또렷이 맴돈다.
“말한 그대로예요. 오늘 아침에 체포되어 끌려가셨어요.”
“도대체 왜요? 무슨 죄목으로요?”
남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여인은 간절한 얼굴로 그의 대답만을 기다린다.
마침내 어렵사리 입을 뗀 남자가 말한다.
“역모예요……. 왕자님은 역모죄로 체포되셨어요.”
여인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남자를 붙잡았던 손은 맥없이 떨어진다.
사랑하는 E에게,
나의 사랑하는 이여, 잘 지내고 있나요? 부디 아무 일 없길…….
저는 지난 이틀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모든 게 혼란스럽고 두려워요. 이 모든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때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그래도 놀란 마음을 달래며 애써 진정시켰고, 그러고 나니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콜튼 선생님이 답장은 받을 수 없을 거라고 하셨지만, 괜찮아요.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디에 계신 건가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인가요? 아니면 높고 아찔한 첨탑인가요? 당신이 장소를 알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나까지 위험에 빠질까 걱정하는 거겠죠. 좋아요. 더 이상 난감한 질문으로 콜튼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을게요.
대신 앞으로 선생님이 편지를 전해 주기로 하셨어요. 간수가 은밀히 말하길, 이름을 가명이나 이니셜로만 쓰는 게 좋을 거라고 했대요. 그러면 검열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요. 어차피 실명을 쓰더라도 우리 이름을 곧바로 알아챌 사람은 없겠지만요.
나의 소중한 사람, 저는 당신이 너무 걱정돼요. 그리고 아주 많이, 아주 많이 보고 싶어요. 당신도 그렇겠죠. 이 사건은 익명의 고발자만 있었을 뿐 다른 증인도, 어떤 증거도 없다고 하니 어쩌면 무혐의로 처리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어쨌거나 당신은 분명 결백하고, 빈약한 혐의만으로 왕족에게 쉽게 유죄 판결을 내릴 일은 없을 테니, 곧 풀려나서 다시 볼 수 있길 기대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꼭 건강해야 해요.
당신의 사랑,
E
추신 : 편지 뒷면에 그림을 그렸어요. 우아하고 멋진 당신의 흑마, 잉그램이에요. 당신은 내 그림도, 잉그램도 무척 좋아하잖아요. 가끔 마음이 우울해질 때 좋아하는 것을 보면 힘이 날 거예요.
어두운 방에 빛이 들어오는 곳이라곤 사람의 눈높이만 한 위치에 있는, 얼굴이 다 채워지지도 않을 크기의 네모난 창문이 전부이다. 그마저도 창살 때문에 빛줄기가 드문드문 나누어진다. 반대편 벽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 그 옆으로는 누구라도 똑바로 누우면 발목은 허공에 둥둥 뜰 만큼 짧은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남자는 세 줄기로 나뉘어 들어오는 햇빛에 편지를 비추어 읽는다. 길지도 않은 편지를 읽고 또 읽느라 한참을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러다 편지를 뒤집어 뒷면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가 싶더니, 곧 다시 종이를 뒤집어 편지글을 한 번 더 읽는다. 아래쪽 보낸 이의 이름에 입을 맞춘 후, 남자는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