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 3. 삶의 글을 그린 지도

by 허병상

아직도 가야할 길 1부 훈육

세상의 모든 자녀를 위해 이 글을 요약합니다.

출처: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3-1. 삶의 길을 그린 지도

우리가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삶을 가꾸어 가는데 필요한 지도를 그리게 된다. 지도가 정확하면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게 될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이 정해지면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를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쉽지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가 끝날 때쯤 이러한 노력을 멈춘다. 그렇게 되면 그 지도는 작게 대충 그려지고 말아 세상에 대한 견해는 편협하고 오류투성이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년 말기쯤 가면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도가 완전하고 세계관은 옳다고 확신하고는 더 이상 새로운 정보에 흥미를 갖지 앉는다.

운이 좋은 몇 사람만이 죽는 순간까지 삶의 비밀을 탐구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과 진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를 수정하고 다시 정의를 내린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므로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야 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 대규모의 수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태껏 익숙해진 지도를 대폭 수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낡은 견해를 수정하고 고치기 보다는 그것을 끝까지 옹호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이를 피하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을 때 지도를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절제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에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전적으로 진실에 헌신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쉼 없이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부모가 청소년기의 자녀에게 "너는 생각을 너무 많이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잘못된 얘기다. 생각하는 능력,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바깥의 환경을 성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맞닥치는 위험의 근원은 우리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부단한 자기성찰과 사색의 과정이 긴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우며 더 큰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진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이란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우리가 삶을 통과하기 위해 가진 지도가 정말 유효한지 확인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의 비판과 도전을 받을 수 있게 자기 지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꽉 막힌 세상 안에서 살게 된다. 시인 실비아 플러스의 비유를 사용하자면, 진공의 병 안에서처럼 우리는 자신의 악취가 풍기는 공기를 거듭 들이마시면서 점점 더 깊은 자아도취에 빠지는 셈이다.

도전을 피하려는 경향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성이라고 해서 필수불가결하다거나 유익하다거나 바꿀 수 없는 행위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지에다 똥을 싸는 것이나 양치를 하지 않는 것 또한 본능적인 행위다.

누구든 도전에 열린 태도를 취하려면 현실에 대한 지도를 '정말로' 공개해서 심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진실에 헌신하는 생활의 또다른 의미는 정직한 생활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그러한 정직은 고통 없이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도전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은 네 살짜리 아이가 엄마를 상대로 어떻게 램프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깨졌는지 거짓말 하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고 더 세련될 것도 없다. 마땅히 도전에 맞닥뜨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을 우회해보려는 시도일 뿐이다.

3-2. 진실을 숨기는 행위는 거짓말과 같다

거짓말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얀 거짓말과 까만 거짓말이 바로 그것이다. 까만 거짓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얀 거짓말은 내용 자체는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빼버린 말이다.

하얀 거짓말은 흔히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용납된다. 그렇기는 하나 사회적 인간관계가 대부분 피상적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또한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얀 거짓말로 속임수를 쓰는 것은 용납될 뿐만 아니라 애정의 표시이며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는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어떻게든 아이들은 부모가 마약을 한다는 것을 알고, 전날 밤에 싸운 것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 엄마는 신경이 예민하고, 아빠는 도박에서 돈을 잃었다는 것을 안다.

비즈니스나 정치 세계에서도 실력자에게 잘 보이려면 가끔씩 자기 의견을 부분적으로 감추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항상 자기 마음 그대로를 내보인다면 보통의 상사들은 그를 복종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관리자들은 위험인물로 본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과 본연의 모습을 보존하느냐 상실하느냐 그 둘 사이의 여정은 너무도 좁고 험난하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상황에 따라서는 자유로운 의견, 느낌, 사상과 지식조차 표현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자기 훈육은 참으로 끝이 없는 짐이다. 그러나 정직과 진실에 헌신하는 힘든 생활에 따른 보답은 그 힘든 것에 비해 훨씬 더 크다. 개방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를 계속 도전받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직하려는 자기 훈육에 필요한 에너지가 비밀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보다 훨씬 더 적게 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정직하면 할수록 계속 정직하기가 쉽고,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실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개방성 덕에 개방된 삶을 살고, 개방적으로 사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두려움에서 자유로워 진다.

3-3. 균형 잡기

자신을 훈육한다는 것은 유연성과 분별력을 요구하는 힘들고도 복잡한 균형잡기이다.

용감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철저히 정직하려고 애쓰지만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하고, 미래를 위하여 그날그날의 즐거움을 뒤로 미루기도 한다. 현재 처한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균형 잡기란 우리에게 이러한 융통성을 주는 훈육이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화를 내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오랫동안 길러온 감정이다. 화를 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짓밟히고 완전히 짓눌리며 말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도 있다. 또는 남들이 우리를 침해하려는 것이 분명할 때에도 화를 내며 대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닐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화를 처리할 방법을 알아야 하고 화를 표출할 때는 가장 적당한 때와 방식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균형잡기라는 훈육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다.

상충되는 요구, 목적, 의무, 책임, 목표 같은 것들 사이에서 융통성 있게 균형을 잡고 조정해나가려면 포기라는 능력이 필요하다.

아홉 살 되던 어느 여름 아침에 나는 이 진실을 배웠다. 나는 그때 자전거 타기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배운 것을 신나게 연습하고 있었다. 우리 집 인근에 가파른 언덕이 있었고, 언덕 아래에서 길은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나는 그날 아침 신나게 언덕을 내려오면서 점점 빨라지는 속력에 황홀감 마저 느꼈다. 브레이크를 잡아 이런 황홀감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기 처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내 황홀감은 불과 몇 초 만에 끝났다. 길에서 4미터쯤 떨어진 숲으로 나동그라진 것이다. 여기저기 긁히고 피가 났다. 새 자전거의 앞바퀴는 나무에 부딪혀 심하게 되틀렸다. 그때 나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자신을 포기하는 과정이란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히 이루어지는 점진적 과정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적응하고 새로 시작하고 다시 적응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포기를 실천하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훌쩍 성장하게 된다. 여태껏 익숙한 방식들을 한쪽에 제쳐놓고 새로운 자료를 집어넣게 된다. 익숙한 것을 억제하고 낯선 것을 환영하는 것이다. 중년의 위기가 그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고통을 감당해서 더 큰 성숙으로 전환하는 대신 옛날 방식 그대로의 생각과 행동을 고수한다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더 이상의 삶의 여행은 없다.

자기 훈육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이 죽어야 함을 의미한다.

"평생 동안 우리는 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세네카는 2000년 전에 말했다. 또 에리히 프롬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생을 통해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인간은 살면 살수록 더 많은 탄생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죽음을 체험할 것이다.

요약: 장유(長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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