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도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하루 한 글 쓰기 (2-13/34/365)

by 허병상

주어진 주제: 책상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글 한 편 써보기

내가 고른 주제: 뇌는 수동적으로 현실을 기록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구축한다.


오늘 무의도를 갔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40분간 꼬불꼬불, 울퉁불퉁 버스를 타고 찾아 갔다.

그 곳에는 서해바다에서 흔한 개펄은 없고, 파도와 바다와 멀리 수평선이 있었다.

당초의 우려와 달리 먼 길을 간 보람이 있었다. 보고 싶던 바다를 실컷 보았다.

우리 여섯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처럼 시시덕거리며 그때 하던 버릇대로 놀았다.


지금 평소답지 않게 '극적인' 도입부를 시도하는 것은 오늘 주어진 주제가 "다른 곳에서 글 한 편 써보기"이기 때문이다. 무의도에서 글을 썼다면 이런 어색한 흉내를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다녀온 것을 어쩌겠는가?

모처럼의 외출 뒤끝이라 피곤하다. 그래도 "하루 한 글쓰기"를 건너뛸 수는 없다. 자꾸 눕고 싶은 유혹을 누르며 책상에 앉아 독서메모를 뒤적였다.

그래 이 구절이야!


"현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주관적이라는 사실. 뇌는 수동적으로 현실을 기록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구축한다."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p.62)


비록 내방 책상을 마주하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가상 현실'을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언젠가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중국 항저우(杭州)에 있는 서호(西湖)는 1000년 전 소동파(蘇軾, 1037~1101)가 시를 짓고 즐긴 곳으로 유명하다. 그가 서호를 두고 지은 시 한수를 감상하자.


“비가 갠 뒤 서호에서 술을 마시며(飲湖上初晴後雨)”라는 시에서 서호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햇살이 비치면, 호수의 물결은 빛을 머금어 맑고도 고요히 반짝이고,

비 내릴 때면, 산의 빛은 안개에 잠겨 아득히 신비롭도다.

만약 서호(西湖)를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한다면,

엷게 단장하든 짙게 치장하든, 언제나 그 아름다움이 여전하구나.

(한 시 번역: ChatGPT)


소동파를 흠모하던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서호를 방문하였다. 20년 전이었다. 그런데, 그 서호는 수많은 사람들과 호텔들로 둘러싸인 장터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저 멀리 호수 건너편 물 위를 보니 푸른 숲만 보이는 쾌 큰 공간이 남았지 않은가. 그래, 저기 저 곳의 물과 하늘, 숲은 천 년 전 소동파가 본 것과 다름없으리라.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그 곳만 느끼기 위해 집중하였다. 그렇게 나는 소동파와 대화를 시도하였다.


비슷한 경우를 오늘 다시 시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의도의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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