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뒷이야기』⑤ 드레퓌스와 백종원을 가른 감정의 구조
1898년 1월 13일, 프랑스의 일간지 <로로르(L’Aurore)> 1면에 한 편지글이 실렸다.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J'accuse…!)", 서명은 ‘에밀 졸라’. 그는 프랑스 대통령을 향해, 그리고 더 나아가 국민 전체를 향해 전례 없는 공개 고발을 던졌다. 무고한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반역자로 몰고 간 군과 정부, 법원, 언론,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조작과 편견을 침묵으로 방조한 여론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졸라는 그 편지에서 정치 권력보다 더 무서운 대상과 싸웠다. 그가 고발한 것은, 진실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군중, 정의보다 선입견을 택한 다수, 상식보다 증오에 이끌린 대중의 얼굴이었다.
이 글은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단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 유튜브에는 한 인물을 향한 분노가 넘친다. 그 이름은 백종원이다. '민낯', '위선', '먹방 제국', '갑질의 실체'
썸네일마다 분노가 도배되고, 댓글창은 시원하다는 반응으로 가득하다. 백종원이 무고한 존재는 아니다.그는 방송과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기반으로 콘텐츠와 사업을 확장해왔고,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공공성과 상업성 사이의 경계에 선 인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건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대중의 피로와 감정, 분노가 집중 투사된 일종의 '상품 폐기 의식'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백종원 개인이 아니라,
그를 띄우고, 따라하고, 실망하고, 혐오하는 군중과 대중의 감정 구조, 그리고 그것을 먹이 삼아 재생산하는 언론과 플랫폼이다.
‘대중은 옳다’는 말은 민주주의의 조건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전제가 있다. 바로, “대중은 틀릴 수 있으며, 때로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투사’는 내 안의 불안과 실패를 외부 대상에게 떠넘기는 심리 기제다.
백종원을 향한 유튜브적 분노는 이 투사의 집단적 발현이다. "그의 말대로 했지만 망했다"는 감정은, "내가 실패한 게 아니라, 그가 잘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자기위안으로 전환된다. 감정은 비판이 되고, 비판은 콘텐츠가 되며, 그 콘텐츠는 다시 분노를 유통시킨다. 이 과정에서 백종원은 '한 사람'이 아니라 '기호'로 기능한다.
성공한 자, 권위자, 자본가, 방송 권력자. 그리고 기호는 파괴되기 쉽고, 파괴되어야만 안도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 광경에서 우리는 잊는다. 그를 신격화한 것도, 스승처럼 모신 것도, 브랜드를 따라가며 돈을 지불한 것도 대중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라는 단어는 종종 ‘시민’과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작동 방식을 가진 개념들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그것이 시민의 의지라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군중의 감정이거나 대중의 반응일 수도 있다.
이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언론, 여론, 책임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 꼭 필요한 기준선이 된다. ▲군중(Crowd)은 현장에 모인 감정적 집합체다. 이들은 집단의 열기 속에서 개인성을 상실하며, 순간적인 동조와 분노로 움직인다. 흥분과 열광, 때론 폭력성과 광기까지 동반된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마시게 한 아테네의 시민 재판단은 전형적인 군중의 폭력이다. 형식적으로는 시민이었지만, 그들은 이성을 상실한 집단 감정에 휘둘린 군중이었다. ▲ 대중(Masses)은 수동적이고 익명적인 감정 소비 집단이다. 특정 장소에 있지는 않지만, 콘텐츠나 선동에 쉽게 휘둘리고 클릭과 구독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유튜브에서 백종원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다가 돌변해 악의적 편집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들은 대중의 전형이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성찰도 없다.
▲공중(Public)은 공공 문제에 대해 숙의하고 토론하는 집단이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정보와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판단을 내리는 구조를 형성한다.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 ‘공중’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언론의 많은 부분이 오히려 공중을 해체하고 대중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다. ▲ 시민(Citizen)은 권리와 책임을 지닌 정치적 주체다. 시민은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판단하고, 숙고하고, 책임을 감수하는 존재다.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려면 대중이 시민으로 성장하고, 군중이 공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숙고는 줄고, 감정은 넘치며, 참여는 소비로 대체되고 있다.
시민은 판단하고, 공중은 토론하며, 대중은 소비하고, 군중은 흥분한다.
가장 위험한 건, 언론이 자신을 ‘공중의 대변자’라고 착각하면서 사실상 대중의 감정을 리사이클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유튜브, 인터넷 뉴스, 각종 SNS는 겉으로는 공공 담론의 장을 흉내 내지만, 실제로는 시민의 얼굴을 한 대중의 분노를 유통시키는 채널에 가깝다. 언론은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는 순간, 더 이상 진실을 다루는 기관이 아니라, 감정을 상품화하는 장사꾼이 된다.
에밀 졸라가 싸운 건 군부만이 아니었다. 그는 “드레퓌스는 무죄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당신들이 틀렸다”고 외쳤다. 여기서 ‘당신들’은 정부, 사법부, 언론, 그리고 광장에 모여 함께 박수를 친 시민을 가장한 군중이었다.
오늘날의 언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분노가 클릭을 부르고, 클릭이 광고를 부른다는 걸 안다. 그래서 "왜 화가 났는가?"를 묻기보단, "어떻게 더 화나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그 결과, 시민을 위한 언론은 줄고, 대중을 흥분시키는 언론이 늘어난다.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프랑스 사회 전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부끄러움은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중의 감정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이 아님을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언론이 그 감정에 책임 있는 거울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불편한 조명이 되는 일이다.
백종원은 진실일 수도, 허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를 소비하고 조롱하며 분노했던 방식이다.
언론은 대중의 감정 뒤에 숨은 구조를 해석해야 한다. 시민을 가장한 대중의 광기조차, 그것이 비난의 물결이라면, 정면으로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을 다루는 사람의 역할이며, 에밀 졸라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언론의 사명이다.
p.s : 백종원 브랜드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 중에는, 프랜차이즈 구조에 따른 공정성 문제나 운영상의 갈등처럼 타당한 이슈들도 존재한다. 이 글은 그러한 구체적 쟁점과는 별도로, 그를 상징으로 소비하고 버리는 대중 감정의 구조와 언론의 역할을 성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사진=백종원 유튜브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