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어쩌다 기자가 됐다

리포터에서 기자가 되기까지

by 임가영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부지런을 떨어야 마음이 놓인다.

아침 7시 40분에 방송되는 지역 프로그램 리포터였던 시절,
내 하루는 늘 남들보다 조금 빨랐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옷을 챙기고,
아직 어둠이 남은 거리를 지나 방송국으로 향했다.
거리엔 환경미화원의 빗자루 소리와
술이 덜 깬 취객의 휘청거림만이 남아 있었다.

PD가 미리 편집해 둔 테이프를 돌리고,
작가가 써둔 원고를 내 목소리에 맞춰 읽었다.
나는 주로 시사나 건강, 문화 프로그램을 맡았다.
축제 현장을 소개하는 리포트는 내 몫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내 얼굴 탓으로 돌렸다.

카메라 앞에서는 언제나 표정이 단정했고,
감정의 결이 매끄럽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스물넷의 나는 바바리코트를 입고
리포터보다 기자에 가까운 현장을 누비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경험이
훗날 내 기자 인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리포터 생활 3년 차 무렵, 함께 일하던 프리랜서 PD가 말했다.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나랑 같이 시험 한 번 볼래?”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렇게 얼결에 기자가 됐다.

입사 첫날, 나는 핑크색 플레어 원피스를 입고
보도국 문을 열었다.
무채색 정장 사이에서 혼자 튀어 보였던 그 옷.
나중에야 들었다.
선배들이 ‘쟤 한 달 안에 그만둔다’에
10만 원씩 내기를 했다고.

보도팀 막내로 뛰던 시절,
새벽에는 사건 사고, 낮에는 취재,
밤에는 회식이 이어졌다.
일과 술에 절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쓴 리포트가
방송을 타는 순간의 짧은 쾌감이 있었다.
그게 나를 버티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청에서 명함을 내밀자
신문사 선배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HCN? 그게 뭐야? 우리 집 케이블 안 나와.”
그리고는 명함 대신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날의 모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화려한 옷을 버리고 머리를 잘랐다.
출입처를 뛰며 단독 기사를 하나둘 써 내려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불렀다.
“아, 걔”가 아니라 “임가영 기자.”

그래도 여전히 버겁고 막막했다.
매일 새로운 아이템을 짜내야 했고,
내가 쓴 기사는 늘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멀쩡한 가로수가 쓰러지길 바라기도 했다.
그만큼 매일이 조급했고, 생존이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새 1년이 흘렀다.
나는 소금에 절인 오이지처럼 쭈그러들었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나라는 이름의 첫 문장이었는지도 모른다.

24살 리포터 시절의 나



기자 1년 차 시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프레스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