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모임을 가다가 차가 퍼졌다. 갑자기 차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더니, 엔진 소리가 작아지며 서서히 멈추었다. 시동은 걸리는데, 거기까지. 시동도 이내 꺼지고 차는 길가에 섰다. 왜 이러지? 이렇게 차가 중간에 멈춰 선 경험은 제네레이터의 고장인 경우가 있었고, 주차해 놓은 뒤 시동이 안 걸린 경우는 배터리에 문제가 있어서였다. 그러면 이번엔 무슨 원인일까? 계기판의 주유 상태에 불이 들어오긴 했어도, 이 차는 저 정도의 주유 미터 정도는 주행할 수 있는 거리가 꽤 남았다는 것만이 경험상 터득한 정보였다.
우선 보험사의 긴급출동을 배터리 이상으로 신청했지만, 신청하면서도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고 비상깜빡이도 켜지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아닌 듯했다. 그래도 ARS 응답에 이런저런 설명을 할 수 없어 일단 신청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화하여 상황설명을 하였다. 그리곤 긴급출동 팀에서 전화가 와서 ARS에게 할 수 없던 설명을 하곤 배터리보다는 기름이 떨어졌을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다고요? 비상깜빡이도요? 네. 그럼 기름일 가능성이 있으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20분 정도 기다려 주세요. 네. 이제 루미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동네 길목이라 사람들이 관심을 갖아, 저만치 차가 보이는 즈음에 가서 왔다리 갔다리 산책했다. 그동안 차를 탔을 남편에게 전화해서 이만저만 설명하니, 차 있는 곳이 어디며, 온다고 한다. 아냐. 긴급출동팀이 전화했으니, 기다리면 되지, 뭘 와. 볼일 보셔. 모임의 지인은 기름을 조금 사 온다고 한다. 아니요. 보험사 출동팀이 온다고 했어요. 슬슬 산책. 여기도 예쁘네, 하똘이랑 여기까지 산책 와야겠다. 낯익은 차가 다가온다. 남편의 차다. 이거 타고 모임에 가. 출동팀 오면 내가 이 차 가져갈게. 아냐. 곧 올 거야. 뭐 시험이나 면접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조금 늦어도 괜찮아. 그래? 남편은 그럼 볼일을 보러 간다며 한마디 한다. 미국 갔다 오더니 기다릴 줄도 아네. 그러네...
그러고 보니, 평소에 남편이 저리 말했으면 틀림없이 되받아쳤을 것이다. 뭐! 그래서 너는? 하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인 건 미국을 다녀온 후 변한 루미씨의. 모습이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 보스턴 입국심사에서의 가방을 잃어버리고 비행기도 놓칠 듯하여 두려움에 동동거렸던 기다림부터 시작하여 4곳의 박물관을 입장할 때, 디즈니랜드의 한 매장에서는 명품매장도 아닌데 일정 정도의 고객이 나간 다음 새로운 고객을 입장시키기도 했다.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헐리웃 볼에 갔을 때도 긴 줄에 서야 했고, 차들이 빼곡히 들어 찬 주차장을 나올 때도 기다리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많던 차들은 빵빵거림이나 수신호 없이도 차례차례 제 갈길을 갔다. 기다리니 된 일이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그랜드, 브라이스, 자이언 캐니언 등에 가기 위해선 시간 맞춰 예약을 해야 했고, 협곡과 절벽을 오르내릴 때도 앞선 자들이 먼저 갈 수 있도록 기다려야 했다. 식당에서 우리가 좋은 자리로 저벅저벅 들어가, 저기요! 하고 서빙하는 사람들을 불러 마구 주문할 수 없는 나라인 미국. 식당 입구에서 기다려 안내인이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그리곤 음료부터 애피타이저까지 차례차례 주문받는다. 그러니 미국에서의 생존전략 중 하나는 기다리는 것이다. 루미씨는 4주 동안 기다림을 배운 듯하다.
예전 같으면 왜 이리 안 오는가? 시계를 보고 전화를 걸었을 시간. 루미씨는 하늘을 보고, 냇물을 보고, 저무는 해를 본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루미씨를 남편이 본 것이다. 10여 년을 달달 외우며 영어란 과목을 공부했어도, 미국에서 밥 한 끼 주문하는 게 그리 어려웠는데, 일주일 전 여행하며 배운 기다림은 벌써 사용하고 있으니, 여행으로 한 공부가 책상머리 공부보다 루미씨를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게 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