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뜨거울 무렵에 로봇춤을 기막히게 추는 댄스가수가 ‘아 바람이여’라는 곡으로 리어카 테이프, 일명 ‘길보드차트’로 인기몰이를 했습니다. 그가 박남정입니다. 듣자마자 귀에 착 감기면서도 이상하게 댄스곡인데 트로트가 묻어 있어서 혹시 작곡가가 안치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30세대는 거의 이름 자체를 모르는 분이지만, 1970년대 가요계에서 록이나 고고에 트로트를 입혀서 ‘트로트고고’니 ‘락뽕’이니 하는 신조어를 낳은 당대의 최고 작곡가가 바로 안치행입니다. 윤수일의 국민가요 ‘아파트’가 바로 락뽕입니다. 보통 ‘뽕끼’가 묻은 노래라고도 하는데, ‘뽕끼’는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나름 먹어줬는데, 아무래도 트로트가 그 이후 광풍이 미풍으로 변하는 상황이었기에, 안치행의 부활이 아닌가도 생각했습니다.
‘아 바람이여’를 듣고 바로 안치행을 연상한 것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비롯하여 최헌의 ‘오동잎’, ‘구름 나그네’, 그리고 ‘앵두’ 등의 트로트고고를 작곡한 안치행의 작곡 패턴 냄새가 물씬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트로트고고의 본좌 최헌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당시를 기준으로도 최헌은 1970년대 가수라는 이미지, 거기에 더하려 가요계에서 뽕끼가 옅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워낙에 1970년대를 석권한 최헌인지라 그 각인효과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트로트열풍의 와중에도 아무래도 정통 트로트가 주목을 받는지라 최헌의 트로트고고는 묻혀지는 감이 있었는데, 영화 ‘밀수’에서 ost에서 극적인 부활을 하는 것을 보면, 세상살이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트로트고고도 광의의 트로트이기에 트로트의 고색창연한 특징인 ‘가사의 명확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트로트가 오랜 기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은 곡의 단순함에 더하여 가사 전달의 수월성에 있습니다. 곡이 느린 템포이기에 가사 전달력이 출중합니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꾸준히 트로트 황제 나훈아가 맹주의 지위를 누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게 모르게 작곡도 엄청나게 많이 한 가수 겸 작곡가가 나훈아입니다. 나훈아는 노래방에서의 괴력(?)을 바탕으로 저작권료 1위를 놓치지 않는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트로트의 강인한 생명력의 원천이 바로 가사 전달력이라는 대목은 최헌의 ‘앵두’에서도 또렷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wRVhWYJdlc&list=RDuwRVhWYJdlc&start_radio=1
최헌의 ‘앵두’를 듣다보면 요즘에는 헛헛하고 오그라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그 장면이란 앵두가 사비유(死比喩)이기도 한 입술에 비유된 것입니다.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라는 가사에는 첫사랑인 연인의 앵두같은 입술에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라는 가사는 바로 그 키스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가사에서 ‘흘러가는 구름’이나 ‘구름 속의 태양’을 언급하는 대목을 추론해 보면, 현재는 이별의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키스라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행위가 금지곡의 지정이 남발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1970년대에는 드라마에서 키스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심지어 영화에서도 키스가 등장하면 성인영화로 지정을 했습니다. 요즘과는 천지개벽 수준의 차이였습니다.
‘앵두’에서는 당시를 기준으로도 사비유였던 ‘앵두 같은 입술’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입술로 비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앵두’와는 마침내 키스를 했으나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점을 가사에 녹여냈습니다. 아마도 요즘 같은 세태라면 이런 구닥다리 같은 비유를 가사에 녹여낸다는 발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사를 음미해보더라도 왜 대중가요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했던 시절입니다. 오히려 연애가 사치이며, 연애 포기, 그리고 결혼 포기가 일상화된 요즘보다 낫다는 느낌적 느낌입니다. 키스라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행위를 금지곡 지정이라는 공포 때문에 어렵사리 가사에 녹여냈던 시절보다 금지곡 자체가 없는 지금이 사랑이 더 어렵고 힘들다는 역설이 못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