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장보리’, 그리고 한진희>

by 성대진


손님, 뭐 주문하셨죠?

아까 콩국수 주문했잖아요.


10여년 전 여름. 성남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여사장님에게 콩국수를 주문했음에도 여사장님이 TV드라마에 몰두하느라 제 주문을 잊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사장님이 넋을 잃고 바라보던 드라마가 ‘왔다! 장보리’였습니다. 여사장님의 몰입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콩국수를 다 먹고 나서도 한참을 봤습니다. 지난 회차를 일체 보지 못했음에도 한눈에 드라마의 내용이 비정상적인 것, 일명 ‘막장드라마’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년 넘게 한국 멜로드라마의 간판이었던 한진희가 이제는 주연으로서 연애 당사자가 아니라, 조연인 아버지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사실이 오히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세월이 죄인가! 천하의 한진희가 저런 막장드라마를! 게다가 주인공도 아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드라마 이후 거의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한진희를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라는 유튜브에서 해당 드라마 ‘왔다! 장보리’를 간접적이나마 언급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명시적으로 드라마의 제목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짐작건대, 해당 드라마의 출연진, 감독, 그리고 작가에 대한 배려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리즈시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장드라마의 출연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배우로서의 역할의 변화, 그리고 이에 대한 자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197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멜로드라마의 황제가 바로 한진희였기에 흥미진진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3J8nWK83dA&t=412s

비즈니스 문제로 단역, 조연배우는 물론 무술연기자와 무술감독을 가끔 만났습니다. 그리고 방송국 PD와 외주드라마 제작사 사장을 하는 친구도 만났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드라마는 마약’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TV에서 직접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 어떤 마약보다 강렬하다고 합니다.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드라마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배신한 것 같은 실망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정작 대다수의 시민은 누가 나오지 않더라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음에도 해당 배우는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주연배우에서 조연배우로 떨어지면서 느끼는 감정도 이에 못지않다고 합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기에 주연배우에서 조연배우로 떨어지는 역할의 전환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정작 배우는 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라는 치료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받아들이게 됩니다. 한진희의 라이벌인 노주현은 망가지는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역할의 변화를 인정하게 되었듯이, 한진희는 막장드라마의 출연을 계기로 배우로서의 위상변화를 수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진희는 작가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실은 배우가 아닌 소박한 시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막장드라마를 집필하는가!

막장이 아니면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요.


한진희와 작가의 대화를 음미해 봅니다. 동양의 고전인 논어와 맹자를 드라마화한다면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아마도 애국가 시청률처럼 처참할 것입니다. 막장드라마의 존재는 시청자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밋밋한 내용이라면 그냥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 경험적 사실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시청자들이 막장이라 생각하기 전에 이미 배우들도 제작자도 막장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배우들도 출연을 기피하게 됩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배우도 사람인데 악역과 막장을 연기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만무합니다. 어쩌면 막장드라마의 진정한 범인은 시청자들이 아닌가!

전직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아직도 연기를 꿈꾸는 한진희야말로 배우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연료도 조정이 가능하다면서 연기에 욕심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한진희의 연기열정에 빙그레 웃음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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