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종훈 이야기>

by 성대진

100년이 넘는 미국프로야구(MLB)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뽑으라면 야구전문가의 상당수는 박찬호, 김병현을 상대로도 홈런을 때려냈던 역대 최다 홈런왕 베리 본즈를 꼽습니다. 당연히 언론을 많이 탄 인물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인성(arrogance) 문제, 약물복용 등으로 끊임이 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에, 더욱 인지도가 높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약물로 선구안과 배팅의 정확도를 높일 수는 없기에, 본즈의 능력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물 복용으로 ‘인간계에서 신계로 간 사나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논쟁이 사그라들지 않는 선수입니다. 역설적으로 논쟁이 뜨겁기에 그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노쇼 사건’으로 안 그래도 유명한 호날두가 더욱 유명해진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이렇게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스타의 흑역사는 인지도를 더욱 높여준다는 역설의 변증이 있습니다. 노이즈마케팅과 일맥상통하는 차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 문제에서 아무런 시비가 없었던 장종훈은 역설적으로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직선홈런’, ‘최초 40홈런의 사나이’ 장종훈은 긴 선수생활 동안 인성에 대한 시비, 사인거부 등에 대한 불만 등 아무런 잡음이 없었고, 사건·사고도 없었던 선수입니다. ‘연습벌레’, ‘고졸연습생 신화’ 등 미담만 남은 한화이글스의 레전드가 장종훈입니다. 역설적으로 업적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선수입니다.

장종훈은 여동생이 있습니다. 남매라고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얼굴이 국화빵처럼 닮음꼴입니다. 장성0라고 제 고교 후배입니다(실명을 쓰면 혹여라도 후배에게 생채기가 날까 우려되어 익명처리합니다). 장성0는 고교시절은 물론 졸업하고도 오빠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장종훈 정도의 엄청난 선수가 오빠라면 자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성적은 그저그런 수준이었지만, 오빠덕분에 학교에서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졸업 후 남자 후배의 주선으로 장성0와 저녁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 혹여라도 장종훈의 여동생에게 부담이 될까봐 거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종훈의 고향이 청주라는 것은 야구를 아는 사람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장종훈이 연습생으로 당시 빙그레이글스에 입단하면서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 전부가 대전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장종훈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가족 전부가 노심초사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프로야구선수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장종훈은 타고난 힘과 컨택능력이 출중했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야구선수로 지명을 받을 정도의 운동능력을 지닌 선수들은 많지만, 성공한 선수는 소수입니다.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이 숙명입니다. 주전경쟁은 뜨겁습니다. 이 경쟁을 이겨내야 출전을 할 수 있습니다. 장종훈의 트레이드마크가 ‘굳은살’일 정도로 그는 연습벌레였습니다. 장종훈은 신생팀이기도 했지만, 연습벌레였기에 당시 배성서 감독이 우선적으로 기용했습니다. 노력하는 선수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은 프로스포츠계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습벌레인데다가 장타능력 등 타격에서의 능력을 고려해서 그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장종훈은 원조 타격왕 장효조만큼 수비능력은 타격능력에 비하면 떨어졌습니다. 포구와 송구에 있어서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장신인 까닭에 기민한 동작에서 약점이 있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유명한 알까기 실책으로도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유격수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전환했습니다. 장종훈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에 잠실구장과 대전구장을 자주 찾았습니다. 호쾌한 그의 스윙, 그리고 홈런에 열광했습니다. 개인적인 우환이 있을 때에도 장종훈의 호쾌한 홈런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렸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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