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상황 속에 나를 맞겨라
한국에 온 지 일주일이 좀 넘게 지났다. 호기롭게 브런치를 시작했지만 그간 글을 한 편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구독해 주고 관심 가져준 몇 안 되는 친구들아 미안...) 여행 중에 여행의 순간을 기록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매일 일정을 마치고 나면 그날 하루동안 찍은 사진을 저장 장치에 옮기는 것만 해도 벅찼다. '사진 올리기' 버튼을 누르고 졸음을 이겨내며 샤워를 한 후 침대로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기록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도 깨닫는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흐르는 순간이 아니라 흘러간 기억이 되어버린 여행의 면면을 하나하나 기록해보려 한다. 집에 돌아와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가 수기로 작성한 계획서를 펼쳐보니 무려 15개 숙소를 다녀왔고 가 본 도시는 그걸 훌쩍 넘었다. 각각의 도시는 다른 빛깔로 나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다. 도시마다 뿜어냈던 고유한 색깔들을 이렇게 소소한 글로나마 꺼내보려고 한다. 이동한 순대로 기록하되, 세부 일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도시가 주었던 인상과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를 꺼내보려 한다. 앞으로 적는 것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입각한 것일 뿐 일반화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밝힌다.
이야기는 아직 런던에 머물러 있다. 런던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런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부터 적어보고자 한다. 그건 바로 런던의 날씨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듯, 런던의 날씨는 그야말로 예측불허다. 가족들이 날씨에 집착한다고 놀릴 정도로 나는 날씨를 중요시하는 편인데, 여행오기 전 하도 주변에서 런던 날씨가 별로라기에 애초부터 기대는 없었다. 막상 런던에 가서 겪어보니 런던 날씨는 가만히 있는 사람도 울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 본 여행지들 중 이렇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날씨는 겪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갑자기 비바람이 불었다가 (우산이 무용지물이 되는 무력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구름이 꼈다가 햇빛이 고개를 든다. 이런 일련의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구름이 지나가는 속도도, 해가 나오는 속도도 빨라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 처음에는 힘이 들었다. 날씨가 정말 변덕스러울 때에는 기껏 챙겨간 우산도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잠깐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대한 원망감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어쩔 때는 하늘이 마치 우리를 된통 당해보라며 골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더군다나 나는 날씨에 기분이 크게 영향을 받는 편이라, 한 번씩 강한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간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 지수가 절로 올라갔다. 별 것 아닌 날씨 하나 때문에 이렇게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게 억울했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과감히 마음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무력감이 어이없음으로, 어이없음이 웃김으로 바뀌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난데없이 비가 내릴 때마다 '허허허' 하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력하게 살이 꺾여 쓰러지는 우산을 억지로 펴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접어버리고 이리저리 마구 흩날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아버리기로 했다.
상황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나를 맡기니 뾰족했던 마음이 둥글어졌다. 런던에서 막 여행을 시작할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두 달 동안의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어쩌면 나는 런던의 날씨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체화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