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SAVE THE KING

대관식의 열기가 남아있는 윈저성에서 시작한 런던 여행

by 민트


지난 글에 썼던 것처럼 여행을 오기 전까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못 느꼈을 정도로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육체적 피로를 이미 많이 느껴서일까? 장기 비행이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4년 전에 유럽을 갈 때만 해도 부담감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나이가 든 건지… 부모님이 들으면 코웃음 치시겠지만, 점점 장기 비행이 두려운 걸 보면 나이를 먹어가긴 하나보다.


16시간의 비행

핀에어 기내식. 블루베리 주스는 몇 번을 더 리필해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원래 블루베리 주스가 유명하다고 함) 와인도 무료로 한 병씩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일정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핀란드 헬싱키 공항에 가서 경유를 해 영국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인천에서 헬싱키까지 약 13시간, 헬싱키에서 런던까지가 3시간이어서 총 16시간 정도가 걸렸다. 기내식은 가는 동안 저녁과 아침 총 두 번이 나왔는데, 맛이 엄청나게 특별한 건 아니었지만 담백하고 간이 세지 않아 몸에 부담이 덜 가는 느낌이었다.


귀여운 아기를 예뻐하는 마음은 국적 상관없이 똑같은 듯. 내 대각선에 앉았던 아기는 답답했는지 비행기 통로를 마구 기어다녔는데, 아기도 아기지만 그걸 또 구경하는 사람들도 귀엽다

오랜 비행시간은 무료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밀린 할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미리 휴대폰에 다운로드하여 둔 전자책을 세 권 읽고 북레터에 업로드할 서평도 썼다. 이번 여행에서 미술관을 많이 갈 예정이라 다운로드하여서 온 책도 주로 미술 관련 책이었다. 런던에서 가 볼 미술관에 관한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읽고 쓰고 밥 먹고 그러다가 약 4시간 정도 취침하고 나니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런던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윈저성

히드로 공항에 짐을 맡기고 가장 먼저 우버를 타고 찾아간 곳은 윈저성이었다. 윈저성은 히드로 공항에서 약 20분 정도 택시를 타면 도착한다. 영국 왕실 소유의 고풍스러운 성이다. 시 외곽이라 그런지 가는 길의 풍경이 목가적이었는데 성 주변에도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풍경화에 나오는 것처럼 생긴 구름의 모양도 감탄스러웠다. 런던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런던의 구름은 형태가 뚜렷해서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는 때가 많았는데, 이 날은 날이 맑아서 그런지 성의 풍경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성 내부는 촬영이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호전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호전적이라는 생각이 든 이유는 성 내부 벽면 곳곳에 왕실의 칼과 총 수백 개가 정갈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이런 무기 장식법은 유럽의 다른 성에서 보지 못한 모습이다) 다른 나라들에서 보낸 화려한 무기들도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윈저성을 건설한 이유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성당 외관. 지난 5월에 돌아가신 엘리자베스 2세의 관이 이 안에 있다. 성 안과 마찬가지로 사진 촬영이 불가능했다.

성채와는 별도로 성당도 한 채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들어가 본 이곳에서 의외의 장소를 발견하게 됐다. 작년 9월에 돌아가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무덤이었다. 어쩐지 이 성을 찾는 영국인 관광객들이 유독 많다 싶었는데, 이곳이 영국인들에게는 국가적인 의미가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여왕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쨌든 몇십 년을 군주로 있던 사람이 묻힌 곳이라니.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묻힌 것 치고는 관의 크기가 작고 덮인 천의 장식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영국인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주는 장소성이 있으리라 상상하며 의미 있게 본 곳이다.


대관식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곳


영국에 오기 전까지 몰랐는데, 지난 5월 6일 70년 만에 열린 대관식으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올해 열린 대관식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이후 70년 만의 대관식이자 21세기 최초의 대관식이다. 왕이나 황제가 될 사람의 머리에 왕관을 얹어 그가 왕위에 올랐음을 공표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대관식 전통을 이어나가는 유럽 국가는 영국밖에 없다. 영국의 국가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행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윈저성 근처 거리 모습. 여기뿐만 아니라 런던 거리 곳곳에 국기가 걸려있었다.

고작 며칠 머무는 여행객 입장으로서는 영국인들에게 대관식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섣불리 일반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5월 중순인 지금도 거리 곳곳에 국기 장식이 가득하고 어딜 가든 ‘Coronation’이나 ’God saves king’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는 걸 보면 대관식이 국가적인 행사였음은 분명하다. 여행 내내 그런 장식들을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지만 왕실 성인 윈저성 쪽 부근이라 더욱 크게 기념하는 듯했다.


착륙한 지 얼마 안 되어 피곤했어서 그런지 성 구경도 구경이지만 나와서 테라스에서 쉬면서 누렸던 여유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햇빛이 땅을 비출 땐 하늘이 밝아졌다가 다시 또 해가 구름에 숨었을 땐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날씨가 마치 밀당을 하는 것 같은 이곳에서 잠시 노트를 펼쳐서 성에 대한 감상도 기록해 봤다. 성 방문을 즐거워하는 영국인들의 미소를 보면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감상할지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 테리스에서 누린 20분 정도의 휴식이 정신없는 런던 여행 중 가장 마음에 여유가 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