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새로운 기회

- 워킹맘 강사 이야기 1

by 꿈데이즈



오늘은 2022년 7월의 끝자락이다. 며칠 동안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이 내 마음을 그렇게 내리쬐더니, 오늘은 간만에 아주 시원한 빗줄기가 세상을 뿌린다. 마음이 아주 후련해진다. 한 해의 중간 즈음을 그렇게 건너와보니, 지금의 인생과 그 동안의 인생도 그렇게 커다란 사진으로 연결된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내나이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서, 프리랜서 강사로 일한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그런 지금의 나를 오롯이 되새겨 보노라니, 시간이란 이렇게 훠월~훨 날아가는 한 찰나인 듯 싶기도 하다. 누구나 인생을 쉽게 살진 않았겠다마는, 나도 예전엔 하루 하루를 버텨내기에 무척이나 힘들었던, 사는게 참으로 버겁다고 느껴졌을 때가 있었다. 어린 딸을 키우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학원 강사로 지냈을 그 시절이 그랬다. 물론 그 시절 이후로도 힘든 일이 많이 있었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아주 힘들진 않았다. 아마 이미 그 시절 너무나 힘들게 버텨냈던 시간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버텨낸 살아온 인생 경험들이 나를 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만들었기에, 그 이후를 덤덤히 잘 견뎌내게 했다. 이렇듯 인생의 굴곡은 좋든 싫든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2011년의 어느날의 한 장면으로부터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저 하루 살이처럼 일하던 학원강사 워킹맘이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일화이다. 이 이야기가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나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하는 분들께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 워킹맘의 슬픔


2011년 4월이었다. 그 시절 나는, 오후 1시에 출근해 깜깜한 자정이 되어야 일이 끝났다. 300명 가량의 학생들을 거느리는 학원의 초.중.고등부 강사였다. 덕분에 아이들 시험이 나의 시험이 되어, 일 년 네 번의 시험을 나의 인생을 치르는 시험처럼 온 정성의 정성을 들였다. 하물며 때로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시험 성적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깨끗한 물을 떠놓고서는, 얼굴조차 잘 알지도 못할 온갖 신이라는 분께 두 손을 바르게 모아 엎드려 절을 올리기도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아이들. 제발 성적 잘 나오게 해주세요”라며 말이다.

학생들의 성적에 울고 웃는 그런 학원 강사를 시작하게 된 건, 내가 2002년 서울에서 의상디자이너 일을 관두고서부터였다. 서울에서 3년 디자이너일을 관두고 부모님이 계신 지역으로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에 빠졌었다. 그때 어렸을 적 막연한 꿈을 생각하며 작은 보습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친지도 그 당시 어언 8년 차였다. 어느덧 가르치는데 적지 않은 경력이 생겼고, 제법 큰 학원에서 300명 이상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나름 프로강사가 되어 있었다. 자정이 되어 집에 오면 다시 학생기록부에 학생들과 상담한 이야기를 적기, 그리고 수업자료 만들기로 새벽2~3시가 되어야 잠을 청했다. 하루종일 정장과 하이힐을 장착해 서서 일하는 직업이어서, 퉁퉁부은 다리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참 쉽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아마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내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까. 아니면 몇 년 전 새 집으로 이사 오면서 대출받은 돈 때문이었까. 지금 나를 인정해주는 이 학원에서 더욱 성장하고 싶었을까. 나는 그렇게 힘든 시간을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있었다. 가끔은 하도 말을 많이 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아..."아무리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는 내 목을 생각하며 이러다가 말 못 하는 장애인이 되면 어쩌지 하는 아찔하고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열심히 일한 노력으로 차곡차곡 아파트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철없는 작은 강사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학원에서 부원장직을 제안받았다. 기존 부원장이었던 선생님의 개인 사유로 학원을 관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며 성장하다 보니, 그렇게 커 보이던 부원장직을 제안받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더 힘든 짐을 얻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제 막 여섯살 된 딸아이가 있다. 늘 엄마로서, 같이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듣는 질문이 있다.



“이 애 엄마예요?”



나는 “네,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아, 그러시구나. 나는 얘가 맨날 아빠랑 놀기에 엄마가 없는 애인 줄 알았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내 아이에게 참 미안했다. 늘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나는 그렇게 아이와 바깥에 잘 나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 열심히 가족을 위한다고 일을 하는 건데, 그것이 정말 내 가족을 위한 것일까? 문득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에 수많은 회의가 느껴지기도 했다.





# 엄마,학원을 관두다


여느 날처럼 학원에 출근해 고학년 초등부 수업을 마치고 잠시 쉬었다. 5시부터는 중학생 수업 시작이었다. 중학생들 오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갑자기 핸드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OO이 어머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다름이 아니라 OO이가 바지에 소변을 봤어요. 지금 임시로 다른 바지를 입혀놓았는데, 어린이집에 새 바지를 가지고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아, 제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어떡하죠?”


“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요. 이 바지가 다른 친구 바지라 다시 빨아서 넣어놔야 하거든요.”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이는 새로운 어린이집으로 옮긴 지 며칠밖에 안 되었는 데 아이가 낯선 환경에 있다 보니 이렇게 실수를 한 것이었다. 이제 곧 수업 시작인데, 자리를 비워야 하나 갑자기 큰 고민이 들었다. 곧 관둘 부원장에게 지금 급해서 수업을 빠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원장에게 들은 소리는


“선생님, 선생님 앞으로 큰 자리를 맡게 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무책임해서 되겠어요. 갑자기 수업을 비우다니요?”


이랬다. 난 지금 내 자식이 급한데, 이깟 한 시간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란 생각에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치밀어 오르면서, 그 부원장에게 화를 쏟아부었다. 그리고선 눈물을 훔치며 수업을 뛰쳐나가 집에 들러, 아이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서열도 무시하고 윗사람에게 대든 꼴이 되어, 크게 한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일이 터진 것이다. 문득 난 내가 이렇게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온갖 서글픈 생각에 나는 일을 관두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부원장직을 곧 맡아야 할 모든 내 직임을 내려놓고, 사표를 던졌던 것이다. 하루하루 힘들게 버틴 나의 하루살이 삶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 그렇게 던져졌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구나.

그래. 내가 뭔들 다시 시작 못 하겠나. 그렇게 5년 다닌 학원에 사표를 내고, 이틀 동안은 밖에도 나가지 않고 폐인 꼴로 집안에 처박혔었다. 아마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을 게다.





인생을 살면서 늘 뜻대로 인생이 이뤄지지않는 다는 것을 우리들은 안다. 그 예상치 못한 일로, 내 지인은 가족을 잃기도 했고, 또 내가 아는 분은 장애인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예상치 못한 아픔이 우리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바꾸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소설 이야기처럼 무심코 떠올릴 수 있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차마 이루 헤아리지 못하는 아픔이다. 나도 그랬다. 늘 엄마란 자기의 인생과 더불어 누군가의 엄마이기에 주어진 몫이 두 배, 세 배이다. 특히 돈을 벌어야만 하는 워킹맘은 더욱 그렇다. 그래도 힘을 내자. 힘든 여정이 당신에게 더없는 삶의 멋진 근육이 되어줄테니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엄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엄마는 가장 위대하지만, 그 중 워킹맘 엄마는 더 위대한 존재다. ^^







# 새로운 기회가 열리다.


며칠이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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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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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지역 학원 강사 구인공고를 봤다. 생각보다 구인광고가 별로 없었다. 몇 군데 전화를 넣어, 이력서를 그렇게 냈다. 큰 학원 자리는 없었고, 유, 초등부를 보는 학원만 있었는데, 그 중 한 군데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치원 아이들도 봐주는 곳이라, 강사 자녀도 무료로 수업 제공해줄 수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이제 어린이집에서 학원차로 픽업되어, 나와 같이 수업하다가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학원 자체가 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 이런 시스템도 가능할 수 있구나 싶어 참 다행이었다. 다만 전에 있던 학원과는 월급이 엄청 차이가 났다. 전보다 훨씬 많이 줄어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몹시 나쁘지만은 않았다. 월급은 줄었지만, 이제 진짜 내 아이를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이런 게 삶의 이치인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부원장직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던 나는, 다시 더 작은 학원에서 꼬맹이들이나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



인생이 나를 이리로 데려온 것은, 뭔가 내게 또 새로운 기쁨을 안겨 주려고 하는 것이리라. 내 아이를 위한 더 값진 삶을 살라는 게시인가보다. 나는 그렇게 더 좋은 기회로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의 알 수 없는 길 속에서 우리는 때론 방황하지만, 결국 계속해서 길을 걷는 자는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찾는다.


다행히 그동안 아빠의 손에서 자라났던 아이는 엄마의 손에서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라나게 되었다. 어린이집이 아니어도 학원 생활에서 또 엄마랑 같이 있는 나날이 많았기에, 늘 가까이서 아이를 지켜볼 수 있어 그렇게 많이 감사했다.


사랑하는 내 아이의 오줌싼 바지 때문에 또 새로운 인생을 걸어 갔다.

아니 그 아이의 바지 때문에 나의 새로운 인생 이야기가 펼쳐져 갔다.



고맙다. 딸아. ^^
사랑한다.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