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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야 Hoya Jul 05. 2024

[에세이] 흉터는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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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빛을 내는 진주

 

조개는 이제 육지에 올라가기 위한 발버둥을 멈추었다. 이 몸부림의 시초는 스스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말인즉슨 무언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룰 수 있다며 막연하고 이상적인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내가 있을 곳이 자갈과 모래들이 가득한 어둡고 짙은 혼돈이었다. 철저히 홀로된 바닷속에서 열등감과 근심을 담아 무언가를 움켜쥘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만 피워냈다. 그렇게 얻은 헛된 희망들로 얻고 있는 안위도 잠시일 뿐이다. 


결국 부조리한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까닭은 아무것도 모르던 연약한 살 속으로 들어와 잔뜩 상처를 내고 있는 돌들이었다. 뱉어내지 못한 크고 작은 돌들은 나를 죽이려 들고 있었다. 내가 품은 꿈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한 모순은 한치도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조개껍데기만이라도 녹슬지 않도록 닦아내고 또 보듬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뱉어내지 못한 돌들을 잔뜩 머금은 현실을 온전히 바라보려고 한다.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발머리, 굳게 쥔 손 그리고 나비

 

1991년 12월, 흰 저고리에 검은 한복 치마를 입은 소녀가 강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50년이 흐른 기억을 꺼내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개 증언한다. 단발머리에 굳게 쥔 손을 한 17살 소녀가 50년이 지난 후에야 치가 떨리고 가슴 저리는 상처를 꺼냈다. 일본은 그들의 역사에서 살아있는 증거인 수많은 소녀의 목소리를 부인하고 비하함으로써 지워냈다. 


정서운 할머니는 14살의 나이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끌려갔다. 당시 술에 취한 일본 장교에게 처음 강간당한 뒤 일본군과의 성관계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그녀에게 아편을 투여하기 시작한다. 아편에 취해 일본군을 상대한 소녀는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집에 돌아오게 된다. 그토록 바라던 집에는 가족들과 일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 공허함만 감돌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 되면 흉터를 입힌 사람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얼마나 산산이 부서졌는지 직시하게 된다.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기까지 중독된 아편을 끊으며 떨어뜨린 눈물을 헤아릴 수 없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번째 증언 이후로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는 240명이며, 현재는 9명의 생존자가 계신다. 그녀들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파도가 요동친다. 누구든지 결코 놓지 못할 씨앗이 있다. 소녀들에게도 한 때는 두 손에 가득 담아내어 간직했을 꿈이 있었다.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산들거리는 풀밭으로 뛰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중히 나누던 추억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싹을 틔워보기도 전에 부조리한 구조 속 국가적 폭력의 피해자로 진물이 나는 흔적만이 또렷하게 남게 되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존자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일본군들이 실제로 행했던 잔혹 행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비윤리적인 부조리 속에 일어난 국가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감금되어 있던 위안부 여성들, 위안소의 수와 위치에 관한 문서도 전부 파기되었다. 이후 성노예제에 관한 문서와 영상 자료를 공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에 대항하고 현재까지도 국가의 손으로 자행되는 불의를 입증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한 집회는 1,600회에 육박하게 되었다.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져 있던 소녀상은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나비망을 넓혔으며, 폭력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향한 실질적인 배상과 범죄의 기저에 있는 여성 차별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녀들이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살고자 함이요, 살고자 함은 살아있음 즉, 누군가 삶을 살아가도록 살려주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맡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고난의 초달(楚撻)을 견뎌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를 위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의무의 영역을 넘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도약이기도 하다. 이 도약의 걸음들이 언젠가 피어오르는 꽃들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소녀들은 할머니가 되어 남겨진 흉터를 토해내듯 진술하기 시작한다. 고난은 인생을 심화하고, 역사를 정화한다. 할머니들의 사무치는 고발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도약할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씨앗이다. 이 씨앗이 누군가에게는 껄끄러움을 안겨주고, 누군가에게는 용기를 심어준다. 2016년 6월 중학교 3학년을 지나고 있는 한 소녀는 지극히 펑범한 학교라는 공간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직시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는 사회가 안전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신뢰가 붕괴하게 만들다. 또한 폭력의 부조리가 가장 낮고 연약한 존재에게 행해졌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몸부림을 안겨줄 수 있는지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 비명을 지르는 상처가 아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중 EBS 지식 채널을 통해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증언을 듣게 되었다. 소녀는 자신보다 비슷한 나이 혹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고초를 겪으신 할머니들이 걷고 있는 행보에 동참하고 싶었다. 소녀의 죽은 심장의 영혼에 다시금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당시 소녀는 고등학생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구체적인 연대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학교와 동아리를 찾게 된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후, 소녀는 원하던 고등학교와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활동에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 중. 고등학교에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소녀상을 세우는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했다. 소녀상을 제작하신 작가 부부를 만나 본래 제작되어있는 소녀상의 크기보다 작게 축소하고, 후원자들에게 전달할 물품들을 제작했다. 그 이후로 전국에 있는 중. 고등학교에 보낸 편지는 100개가 넘는 학교의 연대로 이어지게 된다. 모인 금액 일부는 모금에 어려움 겪고 있는 학교와 위싱턴 D.C 소녀상 건립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2017년 11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 선 고등학생들은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 88주년 기념을 맞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나비 선언문을 발표한다. 선언문에는 ‘작은 소녀상; 건립에 참여한 전국 164개 학교와 2015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 소녀상 세우기에 동참했던 54개의 학교가 이름을 올렸다. 소녀들은 나비 선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정의로운 도약을 위해 피해자를 배제한 독단적인 한일 합의 무효를 선언하기를 촉구했다. 우리는 단발머리에 굳게 쥔 손을 하고 산산이 부서진 소녀를 보듬어 안고 함께 한다.


나비들은 여전히 진물이 나오는 무늬를 안고 서로의 마음에 숨겨진 선한 진심을 연결하는데 힘껏 날갯짓했다. 움틀 거리는 진심에 다시금 빛이 스며들면 찬란하고 영롱한 빛깔을 낼 테니.


“소녀야 이리 오렴. 속상하면 어떠니. 또한 힘들면 어떠니. 너의 어떤 모습에도 나는 괜찮아. 춤을 추며 오렴. 피투성이라도 살아다오. 너의 영원한 새 힘이 되어줄 테니. 나와 함께 날갯짓하며 아름다운 삶이 되리라 믿어줄 수 있겠니. 그리스도와 함께 날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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