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에서 금값이 하락하는 역설(Paradox)
전통적으로 금은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빛을 발하는 '최후의 안전자산'이었습니다. 국가의 신용이나 화폐 가치가 흔들릴 때, 실물 가치를 지닌 금으로 자금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흐름이었죠.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는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금값이 하락하는 기묘한 역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왜 시장은 교과서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는 걸까요?
전쟁이 발발하면 금융 시장 전반에 공포가 확산되며 주식과 채권 가격이 동시에 급락합니다. 이때 대규모 투자자들은 주식 포지션의 손실을 메우거나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수익이 나 있거나 현금화가 쉬운' 자산부터 매각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소에 가치가 높았던 금이 현금 인출기(ATM) 역할을 하게 되면서, 공급이 일시에 몰려 가격이 하방 압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국제 시장에서 금은 달러로 결제됩니다. 전쟁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글로벌 자금은 금만큼이나 강력한 '기축통화 달러'로 숨어듭니다. 미국 연준(Fed)의 고금리 기조와 맞물려 달러 가치가 상승하면, 달러로 표시되는 금값은 상대적으로 비싸게 느껴져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안전벨트'로서의 매력이 금에서 달러로 옮겨간 셈입니다.
현재처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금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집니다. 금은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이자나 배당을 낳지 못합니다. 반면, 전쟁 여파로 시중 금리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 투자자들은 이자를 주는 안전한 국채나 예금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금을 보유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너무 커진 것이죠.
지금의 금값 하락은 금의 본질적 가치가 훼손되었다기보다, 시장이 '공포에 의한 투재'보다는 '생존을 위한 현금 확보'라는 실리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어 금리 인하 기대감이 커질 때, 금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보다 통화 정책의 영향력이 더 강력하게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