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것은 타왕복드가 아니였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가 눈을 맞았고, 그 눈으로 아침에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집 밖에 나온다는 것부터 한국에서 절대 느끼지 못할 아침이다. 어제 세 번째 저녁으로 먹을 뻔 했던 김치찌개를 먹기로 했다. 얼음장같은 이 동네의 온도 덕분에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김치찌개에 찬밥을 비비고 김가루까지 더해서 아주 제대로 먹어버렸다.
진짜 타왕복드로 갈 시간이다. 타왕복드 이야기를 한참 전부터 시작했지만 서론이 무지막지하게 길었다.
새벽부터 눈이 와서 푸르공에 아이젠이 있냐고 물었는데 푸제는 시크하게
“어기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몽골에선 아이젠이 없어도 괜찮은 ‘그런 것'인가 보다. 하긴 내가 몽골 사람이어도 신경 안 쓸 것 같다. 게다가 푸제의 다음 대답은 정말 몽골리안 그 자체였다.
“저희 오늘 갈 수는 있어요? 어디까지 가요?”
“몰라요 그냥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가요"
정확한 목적지도 없고 정해진 코스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 날씨 상황에 따라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고, 그냥 산에 올라간다고 이해했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어기의 푸르공이 가다가 멈추기를 또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들고있는 고프로가 나의 유튜브 채널을 위한 것인지, 몽골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작은 냇물이었다. 어기는 갑자기 차에서 내려 냇물 건너편으로 장화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아침에 타왕복드 등산가는 줄 알았던 어기의 장화 패션은 냇물에서 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역시 어기는 계획이 다 있었다. 어디선가 돌을 주워와 길을 착착착 연결하더니 이내 푸르공에 타 그 냇물을 지난다.
와, 정말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따로 없다. 그런데 또 다른 냇물 미션에 봉착했다. 이번엔 첫 번째 냇물에 비해 약간 ‘강'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기와 푸제가 이렇게 저렇게 길을 만들려던 와중에 저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온다. 타왕복드 관리 공무원이었다. 국립공원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앞서던 순간 국립공원을 증명해줄 사람을 만났다. 아무튼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오늘은 이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고, 이미 차 두 대 정도가 지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의미였다. 마음대로 갔다가 돌아올 수 있을지 조차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 관리인의 집 옆에 푸르공을 주차하고 민둥산에 오르기로 했다.
관리인의 집 뒤편에는 어느 동물의 가죽인지 모를 동물의 가죽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푸제는 우리가 오늘 올라갈 산이 여기라고 말해주었다. 타왕복드 정상을 찍는 건 줄 알았건만 그냥 근처 민둥산에서 타왕복드를 보는 것이었다. 타왕복드 정상에 가는 건 당연히 당일치기로 올라갈 수 없을 뿐더러 사망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 후에 듣고 나서, 안 올라간 우리를 칭찬했다. 물론 진짜 정상에 올라가야 했다면 준비물이 단순한 등산화가 아니였을 것이며, 푸제는 절대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비앰비셔스'(준수, 나무, 슬현) 멤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가끔 뒤를 돌아봤다. 꽤나 힘들었으니까. 셋이 올라가다 뒤를 돌아봤을 때, 나머지 3명과 푸제가 어디있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그리고 웅장한 타왕복드가 저기 있었다. 나는 타왕복드를 보면 내가 눈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냥 저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기만 바빴다. 산을 오르다 잠시 멈춰섰을 때, 카메라의 셔터를 멈추지 않았다. 이 때까진 내가 보고 있는 게 타왕복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유진이 “그거 타왕복드 아니래” 를 외치는 순간에도 외침을 듣지 못하고 그저 저 산을 타왕복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옷을 너무 꽁꽁 싸맨 우리는(정확히 말하자면 나무와 슬현)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산에서 바지를 벗었다.
물론 안에 반바지를 입은 채로. 준수는 이 철딱서니 없는 누나들에게 징그럽다는 말을 남발했으나, 결국 두 번째 스트립쇼(?)에서는 본인도 바지를 벗어 제꼈다. 준수의 마지막 자존심인 히트텍과 함께.
비 앰비셔스 멤버들이 나머지반을 열심히 불러대는 동안 이 사람들은 먼저 내려가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다시 타왕복드 관리인의 집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점심식사가 거의 준비된 후였다.
유진이 말했다.
“야 너네가 본 거 타왕복드 아닌 거 알아? 우리가 불렀는데 왜 대답 안 했어 ㅋㅋㅋㅋㅋㅋ”
“뭐야 저거 타왕복드 아니야? 나 지금까지 저게 타왕복드인 줄"
“아니 그래서 푸제가 타왕복드 아닌데 왜 자꾸 타왕복드라고 하냐고 해서 물어본 거였어 준열이가 저거보고 짭왕복드라고 했는데 푸제 웃겨서 뒤집어졌음"
나무가 뒤에서 말한다.
“난 저거 타왕복드 아닌 거 알고 있었는데?”
나만 진심이었다. 결국 타왕복드에 가서 타왕복드 봉우리를 보지 못한 것이다. 짭왕복드가 아니라 찐왕복드는 우리가 있던 곳과 반대편에 있어 산을 올라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날씨 때문에 구름이 너무 많이 껴 찐왕복드 봉우리는 결국 보지 못했다. 나만 저게 타왕복드인 줄 알았다니. 심지어 내가 타왕복드 여행의 주도자였는데도 바보같이 저 산이 타왕복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쨌든 타왕복드 국립공원의 일부는 맞으니 타왕복드라고 불러야지.
10월에 푸제가 여행박람회 일정 차 한국에 들렀을 때, 잠시 방문한 지아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슬현이한테 이거 꼭 타왕복드라고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