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PTA

학부모회의에서 만난 "초이와루오야지(feat. 추성훈님 스타일)" 회장님

by 혜준

어제는 아들 학교 PTA 회의가 있어서 출석을 했다.

회의 후에는 전년도의 위원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새로운 멤버를 환영하는 간담회(懇談会)라고 불리는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PTA란, Parent Teacher Association의 약자로, 일본의 패전 이후 1946년 미국에 의해 도입된 문화이다.

학교에서 보호자와 교직원이 서로 배워가며 그 성과를 가정, 학교, 지역에 환원하는 것을 목표로, 아이들의 건전한 발달에 기여하기 위함이 목적이라고 한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이제까지 최소한의 의무방어 외의 PTA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내가 마음속으로 우러나서 PTA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유는, 이제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런 기회는 다신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아들이 항상 친구들의 반평균과 학교의 편차치(偏差値)*를 끌어내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어서 일단 나라도 뭔가 학교에 공헌을 해야 맘이 편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도 공부지만, 인간성이라도 좋길 바라는 어미의 마음으로, 엄마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저도 뭔가 느끼는 게 있어 학교에서 공부 못한다고 쭈그러져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학교의 궂은일도 하길 바라는 티끌만 한 염원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팔을 걷어붙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어제 처음으로 회의와 간담회에 참석해 보고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잠시 중심이 흔들려 버렸다.

회의는 문제가 없었다. 각 부문의 위원장이 지난 한 해의 활동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서로 자유롭게 논의도 했고, 회계 감사도 철저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이긴 하지만, 다들 쉬고 싶은 주말에 모여서 학교와 아이들을 위해서 바쁜 시간들을 내서 학교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제까지 너무 편하게 지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해야겠다는 다짐의 시간도 되었다.

놀란 것은 간담회였다. 먼저 학부모만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들도 참석하신 것도 놀랍거니와 그 분위기가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해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일단 내 자식을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 앞에서 그리고 교장 선생님을 마주하며 술잔을 들이켠다는 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론,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선생님과 학부모가 마주 앉아 학교와 학생들의 지도에 대한 서로의 의견 교환을 두런두런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나눴다면 오히려 난 이런 신선한 문화가.... 하고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일단 선택된 가게가 대학생들이 단체미팅이나 하면 좋을 듯한 어두컴컴한 조명에, 그리 청결해 보이지 않는 방석과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는 뭔가 산만한 분위기의 선술집인 것이 충격이었다.

부모들끼리의 격의 없는 친목이라면 돗자리를 펴고 마셨어도 그다지 거부감은 안 들었을 것이다.

미리 선생님들 자리라도 좀 정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들도 학부모들도 모두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대충 3개의 테이블에 적당히 나눠 앉아 어수선하게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점입가경이라.....

술은 무한리필(飲み放題:のみほうだい[nomihoudai])이라서 잔이 비워지면 각자 주문을 해야 하고, 요리도 접시가 비워져야 새로운 안주를 주문할 수 있는 뭔가 비용대비 최대만족을 추구하는 시스템이라, 여기저기서 술과 요리를 주문하는 소리에 옆 사람 이야기 소리도 잘 안 들릴 정도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었다면 늘 하던 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술을 홀짝거리는 게 내 스타일인데, 선생님들도 계시고 얼마 전 필름이 끊기는 무서운 추억이 있은 후, 난 술이 좀 무서워져서(아니, 내가 무서워져서) 자제하고 있었다.


주스를 마시면서 맑은 정신과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은 너무나 재미있고 유니크하기까지 했다. 취했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했다. 항상 기분 좋게 취해서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나였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이렇게 타인을 관찰을 한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에 쏙 들어온 광경은 이번에 회장을 맡은 분의 행동이었다. 첫인상도 약간 초이와루오야지*풍으로 패션도 헤어스타일도 평범한 아버지의 범주를 넘어서 눈길을 끌긴 했었지만, 회장으로서 한 말씀을 하실 때마다 등장하는 "즐겁게"가 조금 신경이 쓰였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간담회부터 자신의 모토인 "즐겁게"를 성실하게 실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어느 틈에 이쪽 테이블로 건너오셨는지, 회장님은 엄마들 중에 좀 젊고 예쁘장한 "오호호호..."하고 페로몬이 넘치는* 분 곁에 딱 붙어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시는 것이 포착되었다. 간담회가 끝나갈 때쯤 예쁜 엄마가 화장실을 갔다 와서 다른 자리로 살짝 옮기기 전까지 그 두 사람은 여기가 간담회 자리인지 데이트 장소인지 나마저 깜빡할 정도로 꽁냥꽁냥 "즐거운"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오이오이!(おいおい: [oioi] 여보세요!, 혹은 야!) 회장님! 이런 곳에서 사욕(私欲)을 챙기시면 아니 되옵니다.

내가 그 회장님의 아내, 혹은 예쁜 엄마의 남편이었다면 이 장면은 그리 유쾌할 것 같지 않은데…

고리타분한 유교적 관념에 절어 있는 전근대적인 사람의 사고, 혹은 50대 아주머니의 질투라고 한다면 뭐 그렇게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하겠다.

하기사 나만 안 그러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의 사교 생활까지 간섭하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간담회는 1년에 2번이라고 하는데, 이런 귀중한 시간을 남녀의 이로케(色気:いろけ[iroke]묘한 매력) 발산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앞으로 1년 동안 초이와루오야지 회장님, 지켜보겠소!!


간담회의 목적은 웃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단 3시간, 그것도 모처럼 선생님을 모셨으면 학부모로서 평소 생각하고 있는 학교에 대한 생각과 정보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했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간이 신뢰와 연계가 돈독해지고 이런 온기가 학교 전체에 퍼졌을 때 인성 교육의 장으로서 학교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적극적인 사람들은 자리를 이동을 해 가며 선생님들을 붙잡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숫기는 엄마 뱃속에 두고 나왔는지 그저 한 번 앉은자리에 망부석처럼 무겁게 앉아서 카메라만 돌리다 온 것 같다.

선생님도 인간인지라 붙임성 있고 말도 재미나게 하고 사교적이고 애교 있는 사람을 보면 이쪽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호의를 갖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름과 얼굴을 익히고 그 사람의 아이가 저 아이구나....라고 눈길을 한 번 더 주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고...

저 구석에 앉아 주스나 쫄쫄 마시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취한 자신을 응시하는 학부모의 눈빛이 반갑지만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어필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간담회는 그런 장소가 아닐 것이라는 내 덜 떨어진 정의감이 내가 엉덩이를 들어 다른 테이블로 이동하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나이지만, 그런 식으로 내 자식만을 위한 인맥을 만들고 싶어서 PTA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걸 혼자 마음속으로 결벽에 가깝게 주장하고 있던 나는 선술집을 나와 집을 향해 빗속을 걸으며 대체 "난 지금까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하고 멘털까지 젖어드는 걸 느껴야만 했다.


앞으로 시작될 PTA활동이 조금이라도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회장님께 다음 간담회 장소와 진행 방식에 대해서 용기를 내서 "오호호호....회장님~"하고 "즐겁게" 건의를 해 볼까나?





⋆편차치(偏差値:へんさち [hensachi]) : 학력 편차치의 줄임말인데요, 제가 여기서 언급하는 편차치는 고등학교에 해당합니다. 일본의 고교 시스템은 완전 비평준화이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일일이 시험 쳐서 입학하므로 각각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다르지만, 전국에서 학생/학교의 위치를 나타낼 때 활용되는 개념이에요. 한국의 고교등급제에 사용되는 수치라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학력 편차치 - 나무위키를 참고하세요.


⋆초이와루오야지(ちょい不良おやじ) : 2000년대 중반 일본 남성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뒤흔들었던 유명한 신조어. 조금(ちょい [choi]) 불량한(不良:ふりょう, 悪:わる [waru]) 아저씨(おやじ [oyaji])라는 뜻입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중장년층은 '회사에 헌신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전형적인 아저씨였는데, 2001년 창간된 남성 패션지『LEON』이 창간되면서 남성들에게 '이제 자신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조금은 발칙하게 멋을 부려라'하고 주장하면서 외모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을 부추기게 됩니다. 음... 저는 개인적으로 추성훈 씨를 보면 외견상으로는 초이와루오야지가 떠올라요.ㅎㅎ


⋆페로몬이 넘치는(フェロモンがただ漏れ:[feromongatadamore]) : 매력이 너무 강해서 마치 페로몬이 줄줄 새어 나오는 것 같다는 극찬의 표현입니다. 주로 중년 배우나 성숙한 매력을 뿜어내는 연예인에게 씁니다만, 전 여기서 약간 꼬아서 썼습니다. 용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