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북을 두드리고, 나는 밤을 두드린다
4월 초까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1월 중순부터 우연히 알게 된 이 "브런치"에서 혼자 매일 즐겁게 놀다 보니 어느덧 4월이다.
할 일에는 전혀 손도 못 대고 지금에서야 아차… 하고 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슬슬 시작해야지...' 하면서도, 눈앞의 재미에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면서 아이들에게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고 잘도 설교를 했다.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가 이제껏 살면서 해야 할 일을 미루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일이 과연 있었을까 자문해 본다.
생각해 보니,
없다.
항상 해야 할 일이 우선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나보다는 남편이나 아이들의 일이 더 우선이었고...
엄마들이 다 그렇지....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아마 이 “브런치"도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의 관심과 불안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면 난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의 성적과 입시에 대한 내 불안과 초조를 잠재우고, 조금이라도 날 붙들고 싶은 마음에, 이런 너덜너덜한 문장을 뻔뻔스럽게 여기 "브런치"에 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아이들이 진학을 하고 나서도 내가 "브런치"에 계속 글을 써서 올린다면, 그건 내가 글쓰기를 "찐"으로 좋아한다는 걸 의미하리라.
뭔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몰입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아들을 통해 본다.
아들이 우주라든지 수학, 곤충이나 동물, 역사나 음악 같은 것에 몰입한다면, 비록 학교 성적이 좀 아쉽더라도 어깨를 두드려주며 우리 아들 힘내라고 응원하겠다.
하지만 아들이 하루 세끼 밥보다 좋아하는 건 "태고의 달인*"(太鼓の達人:たいこのたつじん [taikonotatsujin])이라는 게임이다.
아들이 말하길, 한국 오락실에도 있지만 멘테넌스가 나빠서 그 점이 아쉽다(残念だ:ざんねん [zannenda])고 했으니(너 잘났다(偉そうに:えらそうに[erasouni])), 이 게임을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太鼓는 북을 의미하며, 북채를 들고 노래의 박자와 리듬에 맞춰 정확하게 북을 두드리는 게임이다.
잘은 몰라도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이른바 오타쿠(オタク [otaku])라고 불리는 듯 하지만,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으니 나로서도 막을 도리가 없다.
초6부터 해 왔으니 만 4년은 된 것 같다.
영어 단어는 빵점이면서 A4용지 가득 작은 부호 같은 악보를 외운다며 작은 눈을 부릅뜨며 종이가 뚫어져라 기어이 외워 내던 아들.
100엔을 넣으면 2,3곡 연주할 수 있는 데, 한 게임이라도 더 하려고 점심도 굶어가며 북을 두드리던 아들.
학교 수학 시험은 재시험을 보게 되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녀석이 게임의 급수에 실패한 날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낙담을 하고 집에 와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밤에 방에 불을 끄면 잠도 잘 못 자는 놈이 이벤트가 있으면 저 멀리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곳까지 혼자 원정을 떠나곤 한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싫증 나서 다른 게임을 하거나 공부를 시작하거나 하는데 참으로 일편단심이다.
요즘은 현인(玄人:くろうと [kurouto])를 목표로 방학 내내 게임센터에서의 수련과 동시에, 집에서는 닌텐도 switch로 단련을 하고 계신다.
알고 보니 그 '현인'은 전국의 고수들 중에서도 상위 1%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말 그대로 '검은 존재(玄人)'들의 영역이라고 한다. 1%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물집 가득한 손으로 눈물을 닦던 아들의 진심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
아들에게 은퇴 계획은 있으신지 물어보니, 일단 현인까지 달성하면 학업에 열중해 볼까 하시는데 믿거나 말거나....(생일 선물로 받고 방에 장소만 차지하고 있는 전자드럼은 어떨까?)
난 아들을 보면서 처음엔 왜 저러나 싶었지만, 뭔가에 저렇게 집중하는 태도는 참 부럽고 멋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무 물렁하다는 남편의 잔소리를 듣더라도, 나는 가능하면 아이들이 열중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지지해 주고 싶다. 뭔가를 근성(根性:こんじょう [konjou])있게 해 내는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맘만 먹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환상 같은 게 나에겐 있다.
어릴 때의 나는 아이돌을 좋아하다가도 너무 몰입하면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스스로 통제를 했고(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공부 외에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금세 재능이 없다고 포기하고 도망가기 바빴다.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는 나 자신의 개성과 세계가 없는 것만 같다.
"난 누가 뭐래도 이게 좋아!"
하고 당당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멋진 것 같다.
"브런치"의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난 과연 이렇게 글을 발행할 수 있을까.
컴퓨터와는 그리 친하지 않던 사람이 왜 갑자기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냐고 수상한 눈으로 남편이 캐묻지만 않았어도, 난 남편에게조차 계속 글쓰기를 숨겼을 것이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부끄럽다.
하지만, 다들 잠든 고요한 밤에 혼자 거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시간이 자는 시간보다 즐겁고 소중한 걸 보면, 아이들의 대학진학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난 글쓰기를 "찐"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답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들처럼 "현인" 혹은 "달인"의 경지를 향해 앞으로도 이 고요한 밤을 계속 두드리고 싶다.
⋆太鼓の達人에 관해서는 태고의 달인 시리즈 - 나무위키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太鼓の達人의 공식 웹사이트는 太鼓の達人シリーズ公式ポータルサイト | バンダイナムコエンターテインメント公式サイ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