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탁비 드릴까요?’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비행기 안, 옆자리에 아이와 함께 탄 가족이 있었다. 아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신발을 신은 발이 자꾸 내 옆에 닿았다. 작은 침범이 반복되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이어폰을 꽂고 영화에 몰입하며 애써 넘기고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일이 터졌다. 아이가 들고 있던 음료가 내 옷과 좌석에 쏟아진 것이다. 옆을 지나던 승무원이 곧장 물티슈를 가져왔다. 빨간색 음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닦아낸 옷은 축축해져 불편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리며 마음을 눌렀다.
잠시 후, 사무장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방금 전 상황을 언급하며 괜찮은지 다시 묻더니,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으신가요? 세탁비 청구를 위해 연락처를 교환해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한국인답게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화가 나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고 있으니 여기에서 끝내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사무장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시 영화를 시청하려는데 옆자리에 있던 아이의 아빠가 내게 말을 건넸다.
“세탁비 드릴까요?”
(방금까지 괜찮다고 거절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텐데…!!)
애초에 세탁비를 받을 마음은 없었는데도 그 말이 묘하게 불편하게 들렸다. 곱씹어보니 답은 말에 있었다. ‘세탁비는 제가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면 훨씬 덜 불편했을 것이다.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말 한 끗 차이가 보여주는 온도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사과의 말은 물음표보다 마침표에 가까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