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커플의 이야기
아파트 창문 밖으로 보이는 높직한 교회건물을 볼 때마다 몇 년 전부터 눈길을 끄는 물건이 있다. 진한 황색의 타워크레인이다. 별로 넓지 않게 보이는 터에 무슨 건물을 증축하는지는 몰라도 꽤나 까다로운 공사인가 보다. 타워크레인을 그렇게 오랫동안 빌려 쓴다는 건 공사비가 만만찮게 들 것 같다는 짐작을 하며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나를 나무란다. 다 완성이 되면 길에서 보일 터이니 그때 가면 알게 될 것이다.
타워크레인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타워크레인 기사였다. 성씨가 유 씨였는데 이름이 가물가물 하다가 옛 회원과 통화하여 확인하던 중 이름이 튀어나와 알 수 있었다. 유순철(가명)이었다. 그는 자기의 직업 얘기를 하던 중에 작업반장을 놀려 주던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건축현장에서 자재를 집어 나르는 일이 그의 일인데 자재를 빨리 옮겨야 할 때에 놀리느라고 크레인의 작동을 지연시켜 바닥에서 일하는 작업원들의 애를 먹이는 일이 있다고 했다.
몇 번 그렇게 하면 작업반장은 그에게 잘 좀 부탁한다면서 술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치를 보며 꼼짝 못 한다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런데 재미를 붙이면 부작용이 생길 거라고 그러지 말라 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뿐이었다. 그의 직업에 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그에게 다른 기술을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권한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종 타워크레인 사고가 일어났던 때였다.
그는 일언지하에 싫다고 했다. 현재의 자기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와 관계된 한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임인경(가명)씨가 우리 산악회에 가입할 당시에 그녀의 성실한 개성이 잘 드러난 계기가 있었기에 그날 산행했던 회원들 기억에 뚜렷이 각인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해의 봄에 정기산행이 마석에 있는 천마산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그날 십여 명의 회원이 모여 가평행 버스를 타고 마석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산행이 좋았다. 우리 산악회원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서 자연스럽게 젊은 축에 끼지는 못한다 해도 회원으로서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처지였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회원들의 행군 속도에 뒤처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낭의 무게도 젊은이들은 꾀를 부려 가볍게 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으나 나는 배운 대로 예비피복과 식량등을 꾸려서 다녔었다. 뒤에 생각할 때 좀 미련한 짓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천마산은 고도가 812 미터로 마석이 약간 높은 지대이긴 해도 표고차가 거의 산높이에 가까웠다. 중간쯤부터는 가팔라서 산꾼들을 좀 힘들게 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가쁜 숨을 토하고 오르며 뒤를 돌아보고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기쁨이었다. 산이란 늘 그렇게 항상 거기에 있어 인간에게 즐거움과, 오르는 과정의 고생을 되새기게 한다. 하나 산을 원망하면 어리석은 짓이니 무어라 불만을 내뱉었다가도 곧 성취감에 취하여 언제 그랬냐는 마음이 되곤 했다.
정상에 도달하여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과일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회원들은 한 여성을 발견하고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임 인경 씨가 힘들게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보통키에 몸집은 작았으나 단단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정상에 올랐고 회원들을 만났다는 기쁨에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첫 산행을 기어이 해내야 말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자기의 당찬 실행을 결코 자랑삼아 얘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산악회는 또 한 명의 충실한 회원을 확보하게 되어 임원들은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녀의 직업은 치위생사였다. 그녀의 특징 중 하나는 잠을 잘 잔다는 거였다. 머리를 기대면 이내 잠이 드는 스타일이었다. 나의 아내와 미숙 씨와 박 연경 씨 임 연경 씨 이렇게 네 명은 우리 산악회에서 4인방으로 통했다. 어디 가서 좀 길게 쉬는 짬이 있거나 일 박을 할 때는 잠잘 자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건강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첫 산행 이후로 열심히 산행에 동참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꼭 참석했다. 여성회원들 사이에서는 함께하며 말이 통하는 회원이 생긴 걸 무척 반기는 분위기였다. 평소에 산에 다니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어 못하다가 산악회에 가입하게 된 것이 매우 즐겁고 보람된 취미생활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었다. 산악회라는 모임이 어떤 사람이 새로 들어오는가에 따라 분위기가 상승되거나 내려앉거나 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리 산악회도 임 인경 씨가 입회한 뒤로 분위기가 상승하여 정기산행뿐 아니라 비정기산행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취미생활이란 삶의 윤활유 같아서 분위기가 올라가면 주말을 기다리게 되고, 함께 산행하고 나면 기분이 유쾌해지고 하는 일도 잘 되어 일과 취미가 선순환하는 효과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넌지시 그 사람의 취미를 물어보곤 한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취미가 있는 사람은 어딘지 즐거워 보이고 생활에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이 보이기 마련이다. 없는 사람은 메마르게 보이기도 한다.
젊은 남녀가 있는 모임은 자연히 호감을 갖게 되는 순서가 따라다닌다. 혹 잡음이 생겨서 결국엔 산악회를 떠나는 사람도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할 것이다. 분위기가 상승할 무렵에 남성 회원이 들어왔다. 키도 훤칠한 데다가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남성회원들은 든든한 동반자가 늘어나서 좋아했고, 여성들은 젊은 남성이 들어와서 관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밀이었다. 건축 쪽에 종사하는 사람임에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산행을 했었다.
젊은 남성이 들어오니 산악대장은 후배를 훈련하여 든든한 회원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생기고, 봄에는 불암산으로 산행을 잡아 전 회원에게 암벽훈련을 시키는 게 연중행사로 잡혀 있었다. 유 씨도 암벽등반의 맛을 보았고 기회가 더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른 봄 무렵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산으로 정기산행을 잡아서 1박 2일로 가게 되었다. 기차 타고 정읍까지, 버스로 선운산 국립공원 인근 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일찍 출발했다.
잘 다듬어진 도로를 따라 양쪽에 나무가 울창하여 걸어가는 등산객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힘든 줄 모르고 약 1.5킬로미터를 가니 선운사가 나왔다. 울타리엔 동백꽃이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날의 동백꽃은 향기와 함께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산행 때마다 그 지역의 기억을 도와주는 게 하나씩 있다는 것도 추억을 살려주는 지표가 아닐까 한다.
선운산은 삼백 미터 남짓되는 산이라 산행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정상부근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었고, 멀찍이 개이빨산이라는 우스운 이름을 가진 산이 보였다. 회원들이 얘기를 한 참 하다가 와하는 소리를 내며 웃고 박수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유 씨와 임 씨가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둘이 사귀고 있는 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발표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무튼 회원들은 두 사람의 예정 된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회원끼리 결혼한 케이스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 한 쌍은 입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여 결혼까지 약속했다니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아마 몇몇은 좀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표한 사람은 볼 수 없었다. 후에 그냥 한 쌍의 부부가 곧 탄생한다는 소식을 다른 회원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하산하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공을 가지고 게임을 했었지. 젊음이란 어디를 가나 활기차고 웃음이 넘치는 시기가 아닌가.
버스가 왔을 땐 많은 사람이 서로 좌석에 앉아 가려고 창문으로 배낭을 던지고 차문이 미어지게 버스 안으로 들어가는 투혼을 발휘해서 타야 했다. 배차를 한 번 더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한다 싶었지만 그때 지나면 모두들 웃으며 그렇게 산에 갔다 왔다고 얘기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때는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등산을 다니던 때였던 걸 회원들과 만나면 회상하며 웃곤 한다. 그게 낭만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날 나는 시간의 촉박함을 늘 회원들에게 주지시키는 노인네 역할은 하지 않았다. 그날은 특별했나 보다. 주말마다 산에 다니는 것이 회사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어서 어쩌다 월요일에 지각하는 사고? 가 생긴다면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하산할 때엔 나 혼자 비상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같이 간 회원들에게 재촉을 하게 되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악역이 주어진 것처럼 된 거였다. 회원들은 대부분이 직장생활을 하는 터였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리도 여유작작했었는지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여름이 되기 전이었을까, 유 씨와 임 씨가 어느 날 산악회 모임이 끝나고 나서 나에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다름이 아니고 결혼식 주례를 서 달라는 거였다. 뜻밖이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결혼 주례를 부탁받다니. 그 자리엔 집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자격이 없기도 할 뿐 아니라 형님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돼지 안았기 때문이었다.
미신을 믿네 안 믿네 해도 사회 속에서는 안 좋은 일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게 통념으로 되어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운한 표정이 역력하였다. "회장님은 결혼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시고, 슬하에 자재분도 있으니 주례를 설만한 조건이 되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유 씨가 강력하게 요청하는 이유를 들며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나는 내가 주례를 설만한 인물도 못되고 산악회에 훌륭한 두 분이 있는데 그분들에게 청해 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네는 내가 해주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난감했지만 거절하는 이유로 형님의 별세를 얘기해 주었다. 내가 겪은 일이 상관없다고 했다. 끝까지 나는 그들의 간청을 거절하였다. 그렇게 하는 게 타당하였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이 생활의 신조로 되어있다. 옆에서 아내도 그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간곡하게 얘기했었다.
살다 보면 자의가 아님에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은 있다. 하여튼 그렇게 한 쌍의 경사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은 주례할 사람을 구하여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한 뒤로는 산행이 뜸했었다. 신혼재미에 깨가 쏟아질 때이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음 해에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유 씨가 운전하던 타워크레인이 넘어지는 사고로 크게 부상을 당했으며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었다.
부인은 직장도 안 나가고 남편의 곁에서 간호에 전념한다는 얘기만 전해졌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그때 회원들은 문병을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 가자고 했으면 몇 사람이라도 문병했을 것이다.
나도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결혼 후에 등산을 함께 하지 않게 되어 좀 마음이 멀어졌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살기에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는 관계엔 그렇게 되는 것이려니 했다. 나와 아내는 유 씨의 사고소식을 접하고 나서 주례 서지 않기를 잘했다고 얘기했었다. 어떤 불행이 닥치면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되어있다. 원망의 대상이 나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불행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었다.
두어 번 소식을 들은 뒤로는 그들의 안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조금이라도 갖추고 살아야 제구실을 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수준에 못 미친다는 사실이 허탈 해지기도 했다. 왜 기억이란 것은 애달프고 슬픈 것만 더 많이 떠오르는 걸까. 봄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창밖의 풍경이 서늘한 방 안의 공기와 함께 나를 우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