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구담계곡

by 늦은구름

그 여름의 구담계곡

80년대 말에 회사에서 하기휴양소를 강릉에 설치했었다. 나와 아내는 휴양소를 한번 가보기로 했다. 본래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가기를 꺼려했지만 아내와 모처럼 떠나는 여름휴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한참 산에 푹 빠져서 휴가라면 무조건 산악회의 하계훈련에 참가했었던 때였다. 나이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서 함께 산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는 게 하나의 보람으로 느끼던 때였다.

아내에게 산행의 즐거움을 늘어놓고 산행하기를 권유하여 막 아내도 산행의 즐거움에 발을 들여놓던 시기였다. 마침 회사에서 휴양소를 마련하였으니 우리도 한번 덕을 좀 보자 하고 뜻을 같이하여 마음먹고 회사에서 내준 버스에 올라탔다.

정치는 늘 시끄러운 게 일이었다. 그 건 '정치꾼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지'하고 제법 긴 여정을 버스에서 흔들리며 스치는 산천을 바라보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내도 기대를 하는 눈치였는데. 집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온 것이 염려되기는 했으나 고등학생들이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였다. 버스에 탄 다른 가족들도 나름대로 기대반 걱정반인 표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부부는 영덕에서 신혼생활을 할 때 동해 바닷물에 몸을 담가 본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바닷물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으니 강릉휴양소는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


민박집으로 구성된 휴양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일단 바다에 들어갔다. 여름과 바다는 어울리는 한 쌍처럼 해마다 사람들을 가슴 뛰고 부풀게 하는 매력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야 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입술이 파래졌다고 했다. 사나이 존심 상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인 걸 어쩌랴.

베트남에선 그 덥고 습한 날씨에도 잘 견디었건만 냉기엔 힘을 못쓰는 형편이었다. 아무튼 남들은 신나게 자맥질을 하고 웃고 떠들면서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날은 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엷은 구름이 끼어 나에겐 정말 재미없는 날이었다.

밤엔 다른 팀들처럼 술판을 벌였지만 같이 간 임 씨만 마시게 되어 내가 미안했다. 우리 부부는 내일 산으로 갈 작정을 하고 있었기에 술을 많이 마실 수 없었다.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멍게를 사서 나누어 먹었다. 싱싱한 갯내음을 풍기며 단맛이 나는 멍게는 시중에서 사 먹던 멍게 맛이 아니었다. 그날 먹은 멍게맛은 오래도록 혀끝에서 사라지지 않아 가끔 그 여름의 동해안 멍게를 얘기하곤 했다.


이튿날 일찌감치 배낭 꾸려 짊어지고 임씨네와 작별인사를 했다. 내가 산에 다니는 걸 아는 임 씨는 말릴 처지가 아니라 우리를 떠나보내면서 서운한 눈치였다. 설악동 입구까지 버스로 간 다음 우리는 인파를 따라 혹은 앞서면서 신흥사를 지났다. 비선대를 올려다보는 데서부터는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늘 겪는 것이지만 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 걸 견디는 과정이었다. 걸음걸이는 느려지고 숨은 가빠진다. 아내는 힘들어하면서도 처음 와보는 설악동의 풍경에 매료되어 힘든 것을 이기고 있었다. 바위와 나무들과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자연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따질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냥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일 뿐이다. 힘은 들 망정 공기는 맑으니 마음 놓고 들이마실 수 있는 게 고마웠다. 한 발짝 두 발짝 디딜 때마다 좌우를 번갈이 쳐다보며 내가 이 신비스러운 산골짝을 지나간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아내가 힘에 겨워 자주 멈춘다. 나도 덩달아 서서 기다리며 쉰다. 천불동계곡을 지나고 양폭대피소가 우측으로 보이는 곳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는다. 앉을 만한 자리를 잡아 점심을 먹었다. 여기까지 오는 중에 간식을 먹었어도 에너지가 크게 필요한 산행에선 먹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물소리 들으며 스치는 바람에 땀도 식히면서 우리는 싸가지고 간 밥을 맛있게 먹었다. 오로지 물소리만 들리는 심산유곡에 앉아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도시는 까마득하게만 생각되었다. 이런 자연 속을 지나가는 이 시간이 우리의 인생살이와 별개로 인식되기도 했다.


희운각대피소에 어렵게 다 달아 오래 쉬고 싶었으나 갈길이 멀다는 생각에 조금 쉬고 바로 출발. 희운각대피소는 남쪽으로 대청봉, 북동쪽으로 화채능선, 서북쪽으로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등 거칠고 험한 능선들이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 같은 곳에 있다. 일박을 할 생각이라면 지금 들어가야 한다. 저녁엔 아예 발 디딜 틈이 없을 테니까. 우리는 가파른 바윗길도 있는 소청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대청봉엔 갈 엄두도 못 낸다.

봉정암쯤에서 잠을 잘 생각인데 올라갔다 내려올 에너지가 없으니 말이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달래 가며 세 시간을 넘겨서 소청봉에 닿는다. 힘이 빠지니 더욱 느리게 된다. 그래도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무엇과 바꿀 수 없었다. 동에서 서쪽까지 그리고 북쪽에 보이지 않는 산까지 꿈틀거리는 거대한 능선들이 날카로운 봉우리들을 안고 있는 광경은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슴에 뭉쳐있던 한 덩어리의 무엇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싫지가 않다. 계속 있고 싶지만 가야만 하는 인생이다.

대자연속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잊을 수는 없나 보다. 사유의 한 조각마저 내려놓는다면 내 책임의 중대함을 잊는 게 될 것이다.


봉정암에 도착하니 해는 서편에서 제 갈길을 어김없이 가고 있었다. 벌써 절에는 젊은 남녀들이 가득 차서 어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예 발 들여 밀 생각을 포기하고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본다.

짐을 쌀 때 가옥형 텐트(6~7인용)를 포함했는데 폴대는 뺐다. 너무 무거워 짊어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질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끈을 넉넉하게 준비하여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루종일 무겁게 짊어지고 다닌 텐트가 가치를 발휘할 시간이 되었다.

그냥저냥 하룻밤 견딜만한 곳을 찾아 천막을 쳤다. 비가 오기 시작하여 조건이 만족하지 않았지만 별 수가 없지 않은가. 땅바닥이 젖어 왔는데 아내는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하룻밤만 견디자고 달랬다. 저녁밥을 지어먹고 물기를 피해서 잠자리를 폈다. 그때는 피로가 몰려와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을 방도를 찾지 못했다. 야전삽도 없었으니 맨손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암자는 완전히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스님이 여기는 떠들면 안 되는 곳이라고 큰소리로 주의를 주었으나 잠시 뿐, 밤늦게 까지 그들의 소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는 내려놓았어도 감각은 살아있는 것 같아 온몸이 피곤에 절어 있었고, 나는 고단해서 곧 잠이 들었다. 아내는 밤새도록 잠을 설쳤는지 나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그렇지만 해는 다시 떠서 아침이 되었으니 밥을 지어먹고 출발했다. 아내에게 오늘 저녁엔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말로 사기를 돋워 주고 비탈진 계곡길을 내려가는데, 지난밤 내린 폭우로 그나마 작은 길이 유실되고 없었다. 산사태지점을 피하여 골짜기 길을 찾는 것도 힘이 들거니와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다. 한 시간쯤 내려가자 폭포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장관이 여러 번 펼쳐졌다. 쌍용폭포, 용아폭포, 용손폭폭, 그리고 이름 없는 폭포가 여러 곳이었다.


발밑을 확인하랴, 요란하게 꽂히는 폭포를 보랴 행군이 더뎌지기도 했다. 어제 천불동계곡을 지나며 느꼈던

감각이 구곡담계곡에서는 더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여기가 이승임에도 완전히 다른 세계 같은, 그러면서 더욱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아직 오전이고 산 골짜기를 걷고 있으니 땀이 나지는 않았다. 수렴동 계곡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다가 다리에서 어떤 중년남자 둘이 마주 오고 있어 촬영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부부가 함께 산행하는 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취미가 같고 여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좀 강하게 이끈다 해도 부인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나설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한 낮이 되니 땀이 흐르고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백담대피소 못미처서 개울물이 완만하게 흐르는 곳이 보이자 아내는 목욕을 해야겠다고 해서 사람이 지나갈지도 모른다고 하니 대답도 없이 옷을 훌렁 벗고 는 개울에 뛰어든다.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도 시원한 개울물에 몸을 담근다. 이게 얼마만이냐.

몇 달을 못 씻었던 것처럼 물속을 이리저리 휘저어 움직이며 청량감을 만끽하였다. 다행이랄까 목욕할 동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계곡을 낀 산행을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얘기가 된다.

목욕 후에는 한결 가뿐하게 걸을 수 있었으나, 그것도 반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땀은 등을 적시고 배낭은 어깨를 내리눌러댔다. 지친 발걸음으로 백담사에 도착하여 미니버스를 기다렸다. 절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나라를 요란하게 만든 양반이 있을 때였기에 그만두었다.


우리 부부는 용대리에서 민박을 잡아 노글노글한 몸을 쉴 수 있었다. 민박집에서 해주는 밥은 먹을만했다. 현지에서 채취한 여러 가지 나물무침이 참 맛있었다. 겨우 밥을 해 먹었던 산중에서의 끼니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성찬이었다. 그날밤 우리는 해냈다는 뿌듯함을 안고 단잠에 빠져 들었다. 집에 들어서야 산행이 끝나는 거라고 배웠는데, 일단 힘이 드는 코스는 완료되었으니 마음이 한갓지고 여유로워진 건 사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50대 초, 산에 열정을 쏟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힘들고 험한 산길을 다닐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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