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가로등

by 늦은구름

겨울밤 늦은 시간에 거리는 쓸쓸하다. 그리고 을시년 스럽다. 큰 도로가엔 가로등이 높직이 서서 길을 비춰주고 있으나 그 불빛마저 고독하게 보인다. 불빛이 푸른기운을 띄고 있으면 날씨가 춥지 않아도 한기가 들려고 한다. 도로에 수 없이 지나치는 차들이 뜸해질 무렵이면 행인도 드물어 어쩌다 한 사람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바람이 한번 휩쓸고 갈라치면 무슨 만화속의 한 장면처럼 몸을 움추리게 된다.

그시절 서울 청계천근처엔 도심 지역이라 크고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삼일빌딩 근처에서 시작되는 청계천 고가도로도 없던 시절, 속칭 '나이아가라'라고 불리우던 판자집들이 개천 양쪽으로 개천 바닥에 나무기둥을 박고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집들은 상점겸 살림집이었는데 골목길을 지나 가자면 음식냄새가 배고픈 코를 자극하였다. 밤이면 그골목길은 통행인으로 복잡하고 술 한잔 걸친 사람들이 더러는 비틀거리며 옆사람과 무슨 얘기가 그리 많은지 계속 주고 받으며 지나 갔었다. 50년대 후반쯤에 나는 아직 힘든 십대였고 나이라가라 판자촌을 종종 지나다녔다.


그근처 뒷골목 어디쯤에 빵공장이 있었다. 새벽 일찍 물건을 내야 하는 공장에선 밤이 으슥하도록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부지런히 빵을 만들고 가마에서 구어냈다. 가마의 높은 열기덕에 지하실은 항상 후끈후끈 했었다. 일은 고되었는데, 갓 구어낸 빵은 향기를 뿜어, 비어있는 배를 채우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 빵 한개쯤은 먹는 걸 공장장이나 주인이 보아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진짜로 빵을 즐기는 고참은, 갓 구운 것은 안먹고 두었다가 식혀서 먹곤 했다. 그래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 밖에 잠깐 쉬러 나가면 겨울밤의 냉기는 시원했다.


종업원중에 막내인 나는 심부름을 가끔 가야했다. 시원하던 대기는 바로 한냉한 기온으로 변하고 몸을 웅크리며 빠른 걸음으로 근처에 하나 밖에 없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 때 나무 전신주에 달린 가로등은 백열등이었는데 갓이 고정 되지 않아 전기줄에 매달려 덜렁댔다. 바람이 불면 '땡그렁 댕댕' 하는 소리를 내며 사람을 놀래켰다.

나이아가라 골목길에 있던 가로등은 그래도 따스한 기운이 도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밥집이며 찐빵가게에서 내뿜은 김 때문에 따뜻하게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밤에 나갈때마다 그가로등 밑을 지나야 했는데 '댕강'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지금도 가로등을 볼 때마다 그 겨울밤의 가로등을 떠올리곤 한다. 겨울은 대기가 맑지 않아도 맑게 느껴지는 건 살갗에 닿는 공기의 차가움이 맑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까닭인가 보다. 골목길에 '찹쌀~떡' 소리가 구성지게 들리면 겨울을 실감하던 때였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의 가로등을 못잊는 것은 왜인지 나는 모른다. 아마 어렸을 때 드리웠던 그림자가 워낙 진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겨울의 불빛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내 마음의 구석에 차가운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련한 추억으로 넘겨 버리면 그만일 것 같은데. 이 겨울밤에 창 밖을 바라보면서 어둠속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본다. 내가 있는 방의 불빛만이 나를 온전히 비춰주고 있구나. 거실의 TV에선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로 돌아온 나는 잘 시간이 된 것을 알아 차린다. 오늘밤엔 잠이 잘 올 것같다. 2025.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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