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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Sep 13. 2023

바르게 살자

쉬운 일이 아니지만...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황무지>의 T. S. 엘리엇은 “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를 모르면 근대시를 이해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특히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근대를 나누어 가졌다. 그들 말고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괴테가 이 말을 들었으면 기분 나빴을 거다) 극찬도 이런 극찬이 없다. 근대문학에서 단테와 셰익스피어, 단 두 사람만이 문인이라는 말이다.  물론 엘리엇 개인의 말이다.


얼마 전 그들 중 단테가 쓴 책을 다시 읽기 위해 <그리스·로마신화>를 또 훑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한번 더 뒤적였으며 이탈리아 피렌체에 관한 히스토리를 챙겼다. 그 책은 <La Divina Commedia>, 우리가 <신곡>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원어의 뜻은 <거룩한 희극>인데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제목이 <神曲>으로 둔갑한 것이다.


수년 전 이 <신곡> 3권(지옥·연옥·천국) <민음사>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받은 김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뭔 소린지 몰라도 그냥 읽었다. 밑줄까지 쳐가며, 책 뒤에 수록된 주석을 참조하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며칠 전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어떤 문장 앞에서 내가 왜 이 문장에 줄을 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신곡>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저렇게 요란(?)을 떤 이유가 있다.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마늘과 쑥 그리고 동굴’하면 떠오는 신화가 있다. ‘공양미 3백 석’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라는 단어만 들어도 한국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하지만 외국인은 절대 이해 못 한다. 주석을 참고한다고 해도 그냥 피상적인 정보일 뿐이다. 서양문화의 <그리스·로마신화>,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들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마늘이고 쑥이고 공양미고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내가 저런 우(遇)를 범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저렇게 부산을 떤 것이다.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신곡>이 이탈리아어로 된 운율로 쓰인 서사시이기에 원전의 느낌을 절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방법이 없다. 아니면 미국 시인 롱펠로우처럼 <신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은 없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애제자였던 김운찬 교수가 이탈리어 원어로 '신곡의 1곡 인트로'를 읽어 주고 있다.


<신곡>의 첫 권 지옥문에 들어서 보자. 거기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끔찍하다.


지옥은 9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그곳에는 신앙이 없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사기를 친 자, 폭력을 행사한 자, 쉽게 분노하는 자, 반역과 폭정의 죄를 지은 자, 재산을 탐욕스럽게 모은 자들이 등등이 벌을 받고 있다. (궁금하면 일독해 보기! 아니면 유튜브에서 김운찬을 찍면 동영상으로 볼 수 있음. 대구 가톨릭 대학 소속의 김 교수는 국내에서 <신곡>의 최고 권위자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음)


그곳 중 <림보>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림보는 천주교에서 <지성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첫 번째 지옥이다. 지옥은 지옥이지만 고통은 없고 단지 한숨 소리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으로 가는 관문인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태어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여기로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숨만 쉰다는 것이다. 단테의 논리대로라면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홍범도 장군도 여기에... ㅠ (울분을 참으며 요즘 핫한 홍범도 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조만간... ㅠㅠㅠ)


아브라함, 다윗, 모세도... 세례를 안 받았으니 물론 여기에 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면서 그 연옥 문을 부수고 들어 가셔서 몇몇 선택된 영혼들을 구원해 주셨다. 베르길리우스도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지만 베아트리체의 부탁을 받고 잠시 단테의 저승 여행길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인류 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들도 덕망은 있지만 이교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숨만 쉬고 있다. 물론 단테가 <신곡>에서 하는 말이다.


림보 다음, 밑으로 내려 갈수록 고통이 심한 지옥에 빠진다. 그러니 착하게만 살면 최소 ‘연옥’ (로마 가톨릭이 교회의 교리로서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일부 영혼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장소) 이상은? 보장된 것이다. 이제 바르게 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돌에다가 다짐까지 해보기도 하지만...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문제다. 그래도 바르게 살고 볼 일이다.


           경주로 이사와 초등학교 학훈같은 저 돌에 새겨진 글을 보고 놀라(?)...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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