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여행을 하다 작은 꽃봉오리가 달린 풀을 만났어요.
"안녕, 풀아. 넌 왜 여기 혼자 있니?"
풀이 말을 했어요.
"나한테 말을 거는 생물은 오랜만이야."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야. 너 혼자 여기서 심심하진 않아?"
"난 원래 저 멀리 동쪽에서 날아다니던 바람. 지금은 벌 받는 중이야."
"벌? 무슨 일을 했길래 자유로워야 할 바람이 풀이 된거야?"
"내가 뭔가 잘못을 해서 나무와 엄청나게 싸웠거든."
"무슨 잘못을 했는데?"
"… 나도 잘 모르겠어. 원래도 살짝 치고받고 했지만. 난 걔한테 쓸데없는 소식을 가져다주면서 나뭇잎으로 장난치고, 걔는 나한테 땅 속 소식과 쉴 곳을 주면서 나름 친하게 지냈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말을 너무 솔직하게 한 건지, 어떤 막말을 했는지. 하지만 어떤 말을 잘못해서 나무가 상처를 받은 건 확실해. 그래서 반년이나 그 아이가 날 무시하면서 쉴 자리를 안 줬거든."
"그것 때문에 여기 숨어있는 거야?"
"반년이 지나고 그 아이가 갑자기 사과를 하더라고. 자기가 옹졸했다고. 하지만 그때는 내가 너무 지쳤었어. 화해에 대한 기쁨보다 무시당한 몇 개월에 대한 원망이 더 커져 있었어. 그래서 인연을 끊어야겠다 생각하고 상처를 주고는 말없이 떠나버렸어.
하지만 떠나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내가 나무를 무시한 것 같은 죄책감만 커지더라. 차라리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라 생각하고 여기 풀 속에 들어가서, 마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사과하면 되잖아? 상처 줘서 미안했다고."
"난 그날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아. 바람은 있던 일을 보기만 할 뿐, 남겨놓지는 못하지. 고집도 세서 화난 이유도 물어보지 않았어. 머릿속에 남지 않은 일을 미안하다는 말로 끝내봤자 당장 급한 불 끄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러니 사과를 하고 싶어도 사과할 수 없어.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반년이나 무시당했어. 이미 상처받은 반년은 서로 탓할 수 없어. 무엇을 잘못한 지도 모른 채 사과를 하게 되면 응어리만 남을 뿐이야. 처음엔 그 아이가 먼저 한 사과를 받아들이려 했지. 그런데 갑자기 내가 기다린 시간이 서러워져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 아이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낫겠더라."
소년이 말했어요.
"하지만 너도 잘못을 깨우쳤으니까, 다시 화해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풀 속에 스스로 가둔 것 아니야?
네가 사는 시간 중에 반년은 티끌만큼도 안 되는 시간이잖아. 다시 사과하자."
"난 이미 뿌리내려 풀이 됐거든. 이제 이곳에서 벗어나는 건 힘들어. 상처를 준 만큼의 시간이 나의 수명이 되었어. 그마저도 이 꽃을 다 피우고 질 때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 뭐부터 사과해야 할지 길을 잃었어. 모든 걸 새로 시작하고 싶어."
풀의 한탄을 들은 소년이 말했어요.
"그럼 네 위의 꽃이 다 피어나면, 다시 바람이 되어 그 꽃잎을 들고 그 나무 곁으로 가자. 아니면 서로의 뿌리가 언젠가 닿기를 기도하자. 그때즈음이면 나무도 다시 널 받아줄 거야."
소년이 떠난 후, 풀은 다 시들었지만, 풀이 된 바람의 마음은 꽃잎이 되어 동쪽으로 날아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