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다시 숲을 배웠다

by 혜오

44장.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다시 숲을 배웠다


산불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조심스레 묻곤 한다.

“그런 일을 하면… 마음이 무겁지 않나요?”


나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네. 무겁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를 외면하면 안 되거든요.”


불이 스쳐간 숲은

언뜻 보기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검게 그을린 나무, 잿빛 흙,

바람만 살아남은 듯한 적막.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숲은 늘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타버린 가지 아래에서

연둣빛 새순이 억지로라도 올라오고,

바람은 다시 흙냄새를 되살리고,

사람들은 또다시 그 길을 걷는다.





숲은 참 고요한 방식으로 회복을 시작한다.

마치 “괜찮아, 아직 끝이 아니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 속에서

‘기억’의 모양을 배운다.


어떤 기억은

불처럼 순식간에 번지고,

어떤 기억은

숯처럼 오래 남아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산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빼앗아가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숲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건

산불을 막는 일은

누군가의 대단한 용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주의,

작은 습관 하나,

작게 남겨둔 양심 하나가

커다란 숲을 지켜낸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마음에

‘조금 더 안전한 내일’이라는 씨앗을 심는 글.


브런치에 글을 남긴다는 건

숲의 이야기를

사람의 이야기와 같은 온기로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매번 배운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을

한 번 더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숲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