交感(1. 인간은 빵 만으로는...)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by 할매

(<인도 배낭 여행기>를 끝으로 2월 한달 동안 브런치를 등한시 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련이 왜 생겼는지, 저의 과거적 과오는 어떤 것들인지, 인간사에 크고 작게 스며드는 시련들은 왜 생기는지, 12연기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 저는 얼마나 과오와 실수가 많은 인간인지, '탐진치' 가 아닌 '치탐진' 이라 강조하면서도 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절감하지 못했습니다. 영영 헤어나오지 못 할 거 같은 시련의 늪에 빠지고서야 제 자신이 얼마나 우매하고 어리석은지를 비로소 절감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브런치에도 쉽사리 접속하지 못 했습니다. 이토록 우매한 인간의 글이 다른 사람들께 혹시라도 우매한 영향을 미칠까봐 그게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절필 할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을 때 까지, 생명 현상이 지속되는 한은 살아야 하는 생명체라 그나마 건강한 정신으로 살려면 절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운을 차렸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 과거적에 저는 운전대만 잡으면 과격해진다는 이야기를 딸래미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헌데 글 역시 그런 못된 습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세심히 살펴본 결과 '그렇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동글몽글한 바닷가 몽돌이 아닌 날카롭게 부서진 뾰족한 돌 같은 글이 제가 쓴 것들이었습니다. 깨달은 순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속적인 욕망에 의욕이 넘치고 있건만 나만은 홀로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아무런 분별도 분석도 하는 바 없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분명하기만 한데 나는 홀로 흐리고 어둡기만 하다. 세상 사람들은 사리에 밝고 빈틈 없이 잘 살필 줄 아는데 나만은 홀로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기만 하다. 대해(大海)처럼 동요하고 질풍에 날려 머물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쓸모가 있건만 나만은 홀로 완고하여 촌스럽기만 하다))


어느 지자의 푸념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知者도 저러할진대 하물며 이 촌 노파에 있어서랴 무슨 말인들 하겠습니까~ 할 말도 없고 드릴 말도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뭐라도 해야합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다시 글 올려 보렵니다. 어리석은 글일지라도 노여워 마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교감(交感)>은 2020년에 제 딸아이가 전자책으로 내 준 글입니다. 저처럼 어리석은 글이어서인지 보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용기 내어 여기에 올려봅니다.


그동안 연재북 3권을 브런치에 올리며 1주일에 2편의 글을 올리기가 쉽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글만 올리고 있는 게 아니라 온갖 살림도 해야하고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노년의 삶 가득히 차지하여 그렇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주 1회만 올리기로 했습니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교감(交感)(1.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볼거리, 놀거리, 할거리가 있어야 한다. 사람끼리만 살 수도 없다. 식물, 동물 등 온갖 복합체가 어우러져 생동하는 지구처럼 인간도 그런 유기체들과 삼라만상(森羅萬象) 속에 어울리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울고 웃는다. 울고 웃는다는 것은 감정이다. 사물에 느끼어 일어나는 심정이 바로 감정(感情)이다.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사람을 철면피라 한다. 철면피는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동물과 교감하고 더 나아가 식물과 교감하는 사람은 철면피가 아니다. 交感이라는 감정 속엔 이미 자신의 과오와 실수를 인정하고 부끄러워 하는 감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동,식물과 교감하는 마음 속엔 이미 자비심(慈悲心)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의 원초적 핵은 슬픔이다. 상대의 슬픔에 공감하여 아파하는 마음이 자비의 시작이다. 헌데 요즘 현대인들은 그 공감과 교감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상대의 아픔과 슬픔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닐까? 식물이나 동물도 동종(同種)의 상대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동료의 아픔에 희열을 느낀다면 그건 한참 잘못된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어땠는지 내 과거를 돌아다 봤다. 나는 장성할 때까지 우리집에서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걸음마 시절 집에서 토종닭 몇마리 키웠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기억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글로 쓰리~ 동물이나 가축과의 접촉도 별로 없었는데 뭘 말하리~


그러다 결혼하여 딸래미를 얻고보니 외동딸이어서인지 딸은 동물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수도권에 살 때, 우리나라에 애완용 캘리포니아산 집게가 수입되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되는 조그만 집게인데 지하상가에서 그걸 본 우리딸. 사달라고 어찌나 조르는 바람에 사 주게 되었다. 집이며 사료, 물통 등 셋트로~

어린 우리딸은 애지중지 길렀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엄마 아빠보다 더 좋아했다. 같이 자고 대화하고 놀고~ 내 엄지 손가락 마디 하나의 크기도 못 되는 생명체에 우리딸 아이는 그렇게 좋아했다. 한 6개월 키웠나~

어느날 집게가 운명하셨다. 그걸 본 딸래미~ 울고, 불고, 눈물, 콧물 범벅되어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서러워했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딸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딸과 함께 인근 놀이터에 집게를 장사 지내 주었다. 나는 들러리고 딸은 상주 겸 봉분 인부도 되어~


그리곤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더니 어느날, 아기 고양이를 본 우리딸. 꽂혔다 고양이에게~ 자식 이기는 부모 어딨어~ 막무가내 떼 쓰는 바람에 새끼 고양이를 구해줬다. 그랬더니 딸, 한 이불 속에서 함께 자고 깨고 놀고, 목욕시키고 먹이고 똥 치우고, 쓰다듬고 뽀뽀하고 어루만지고~ 신주 단지 모시는 것보다 더 지극정성이었다. 내 입장에선 자식 새끼 하나 더 생긴 셈. 그런데 어느날...

다음에...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