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드러나는 순간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은 주로 언제일까?
상대에게 큰 교통사고가 나서 자신의 마음을 각성하게 되었다던지, 오해나 갈등이 일어났을 때라던지, 외부적인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이지 않을까. 어떠한 계기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뻔한 클리셰의 반복은 드라마가 아니라 삶에서도 일어난다. 왜 '없어봐야만' 혹은 이러저러한 '충격요법'이 있어야만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걸까. 인간이 그렇게 어리석다.
나는 우습게도 사랑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그랬다. 여러 가지로 어리석은 탓에 제주까지 가야 진심을 찾아올 수 있었다. 일과 떼어놓는 충격을 줬더니 그제야 비로소 내게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아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일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2) 어떤 장소에서
3) 일정한 시간 동안
4)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내게 일은 '월급'을 받기 위해 또는 '성장'을 위해 '회사'에서 '8시간 혹은 그 이상'동안 몸과 머리를 쓰는 활동을 의미했다. 물론, 일은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직원들과 회사에 신뢰할만한 울타리(HR)를 제공하고 있다는 분명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의 의미는 '직장'과 '직업'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둔 지 3개월이 되어가던 그 여름, 제주에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30명에게 각각 다른 내용의 편지와 선물을 보내는 일
-소아암환우의 가족에게 집을 후원하는 일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시간을 쓰는 일
-우리 집에 월세살이 중인 사람의 평안을 비는 일
-오피스제주에서 누군가의 평안을 비는 일
대가로 받는 것도 없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 돈과 시간은 그저 투입되기만 했다.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래도 기뻤다. 그리고 시간을 돌려서 다시 그 선택을 할 거냐고 내게 묻는다면 흔들림 없이 'YES'였다.
이것들은 '누군가 나에게 task를 주지 않아도 세상에 던져진 내가 자꾸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월급을 주는 회사가 없어도, 일을 주는 상사가 없어도 계속 일관되게 신경 쓰고 시간을 투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일'이 아니라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직장'과 '직업'을 넘어서 내가 숨 쉬고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이 '일'의 개념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제주에서 벌인 일들을 한 알 한 알 구슬로 보고 이것들을 하나의 실로 꿴다면 '사람들의 평안을 비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삶에서 남기는 나의 흔적은 어떤 모양으로든 이런 결과를 낳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돈이 없어보고 직장이 없어보니 확연히 드러나는 내 진심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가장 나답게 살고있는 모습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일이 싫어서 제주에 왔으면서 오히려 제주에서 일을 뒤집어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하고 파헤쳐보기도 하는 이상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일에 조금은 항복하게 된 제주의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