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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Dec 17. 2021

위법한 권력의 언론의 자유 탄압(1960~1980년대)

민족일보 조용수, 김주언 기자의 보도지침 폭로 등 언론의 저항사

언론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말이 있다. ‘언론의 자유’다. 쉽게 말해 언론 행위, 즉 언론인으로서 언론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거나 실천하려던 수많은 언론인들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4.19혁명은 이듬해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로 꺾이고 만다. 민주언론인들이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하여 체포,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중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건은 대표적인 언론의 자유 탄압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혁신계 정치인이었던 조용수는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사장으로 취임했다. 몇 달 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조용수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여 구속된다. 북한의 평화통일 주장에 동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해 12월 2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처럼 대한민국 역사에서 언론의 자유를 제약한 사례는 많다. 대표적으로 1960~1980년대 위법한 권력에 의한 언론 자유의 제약 사례를 살펴본다.  

박정희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내건 '혁명공약'


· 박정희 5.16군사쿠데타 ‘포고 1호’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윤보선 대통령 연금·장면총리 피신·박정희 소장 주도의 군사혁명위원회 설치·혁명공약 6장 발표·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포고 1호(집회금지 보도관제)·2호(금융동결 물가동결)·3호(공항 항만 봉쇄)·4호(장면정권 인수·각급 의회 해산·정치활동 금지) 발표 등의 조치를 취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감행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언론사 장악과 보도관제 통제였다.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의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는 무려 59년 만에 2020년 12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포고 제1호 폐지안을 의결함으로써 폐지됐다.  


· 1972년 박정희의 유신헌법 개정 계엄포고 1호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유신헌법 공포를 강행했다. 다음날 계엄포고 1호를 발동했는데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출판 검열 등의 위법한 조치를 취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법적 조치였다. 



계엄포고 1호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하기 사항을 포고함


(1) 모든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 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종교 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한다.

(2)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3)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

(4)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를 금한다.

(5) 유언 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6) 야간통행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7) 정상적 경제 활동과 국민의 일상 생업의 자유는 이를 보장한다.

(8)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 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이를 최대한 보장한다.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수색, 구속한다.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노재현



· K-공작계획


1980년 3월 보안사 언론반장 이상재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 신장을 위한 안정 세력을 구축” 목적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언론(인) 회유 공작 계획을 입안했다. K-공작계획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됐다.  


· 5.18 민주화운동 언론 통제


전두환, 노태우 등에 의한 1979.12.12. 군사 쿠데타 이후 신군부세력은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통제 정책을 실시했다. 언론통제는 보도 검열, 광주 항쟁에 대한 정보 차단 등 5.18 정국에서 본격화됐다. 신군부의 계엄사 통한 언론 통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삭제 표시)과 3면에 당시 전남북계엄분소의 삭제를 위한 빨간색 사인펜 자국 표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저항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한줄도 싣지못

 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 5. 20


 전남매일신문기자 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 언론 강제 통폐합


1980년 11월 11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언론통폐합의 실행을 계획했고, 허문도 등이 ‘언론창달계획’을 입안했다. 11월 12일 전두환의 결재를 득한 후, 보안사에 집행을 위임했다. 보안사는 1980년 11월 12일 오후 6시경부터 언론사 사주들을 연행․소환하여 통폐합조치를 통보하고 신문, 방송, 통신 등 주요 언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조치를 실행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해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언론 자유 신장에 경종을 울린 김주언 기자는 2018년 12월 18일 제17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했다.


· 보도지침 폭로 사건 


보도지침(報道指針)은 제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가 신문사와 방송사에 은밀히 하달한 보도 통제 지시 사항이다. 1985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월간 《말》지에 폭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김주언 기자의 보도지침 폭로는 5공 전두환 군사독재 몰락의 예고탄이었다. 김주언 기자는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국가 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19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 땡전 뉴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 시절 뉴스를 빗대는 말이다. 뉴스를 시작하면 전두환 대통령 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9시 시보가 ‘땡’ 하고 울린 후 나오는 헤드라인 또는 첫 소식에서 바로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이라는 멘트가 나온 데서 비롯됐다.


* 땡전뉴스 영상보기(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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