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엔 내가 좋아하는 작은 책방이 하나 있다.
그곳에 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서울에서 100km 거리에 있는 차로 한 시간 반, 대중교통으로는 두 시간 반이나 걸리는 곳이다. 사장님이 크레파스로 그린 포스터가 엽서로 나왔다는 소식에 예약을 걸어두고 갈 날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드디어 6월 뜨거운 어느 날 연천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도 여러 번 갔던 곳인데 왠지 오늘은 혼자 가기가 싫어서 회사 동료였던 전 차장님께 혹시 시간휴가를 내서 같이 가지 않겠냐고 연락을 했다. 회사 일 때문에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한다. 언니랑 갈까? 언니는 지금 집이 아니라 어려울 것 같고, 상암동 사는 친구 주아를 떠올렸지만 애기 데리고 가기 어려울 것 같아 이내 마음을 접었다.
엄마아빠랑 인스타감성 동네서점을 가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언젠가부터 엄마아빠랑 오래 함께 있는 게 힘들다. 미안한 말이지만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먹고 싶지 않은데 고구마나 떡 같은 걸 싸와서 굳이 먹어보라고 하는 것도 싫고, 유튜브에서 트로트 가수 노래를 들려주는 것도 싫고, 못 배우고 점잖지 못한 부모라 남들 보여주기가 창피했다.
‘엄마는 그런 곳을 좋아하지 않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것도 돈 아까워하니까.’
라는 핑계로 남들하고만 주야장천 다녔다.
어쩌면 엄마는 해보지 않아서 좋은 줄 모르는 건 아닐까. 엄마의 경험은 단출하다. 엄마도 해보면 좋아할지도 모른다. 엄마한테 전화를 건다.
"엄마, 오늘 뭐 해?"
"뭐 하긴, 그냥 집에 있지."
"오늘 나랑 연천 갈래?"
"연천? 왜~에?"
말끝이 올라가는 게 싫지 않은 눈치다.
"내가 아는 책방에 책을 주문해 놨는데 가지러 가야 하거든, 겸사겸사 가서 연천에서 점심도 먹고 올까?"
"그래? 아빠도 물어보끄나?"
"응, 물어봐"
"윤정이가 연천 가서 점심 먹고 오자는데 당신도 가요?"
"당연히 가지. 나는 무조건 가."
핸드폰 너머로 아빠가 대답한다.
"너네 아빠도 간단다. 언제?"
무료한 두 노인네가 막내딸의 급번개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나서겠다고 한다.
"음, 지금 내가 집에서 출발하면 40분 뒤에 엄마네 주차장에서 픽업할게.’
전화를 끊고 서둘러 엄마 아빠랑 연천에서 갈만한 곳을 급하게 검색했다. 날씨가 더워 바깥을 돌아다니긴 힘들 것 같고, 실내인 선사박물관과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볼 수 있는 최전선인 열쇠전망대가 있다.
오늘은 효도하는 날이다.
주차장에 들어가니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엄마가 서있다. 그 옆에 아빠가 우스꽝스러운 모자에 언니가 사준 커다란 아디다스 티셔츠를 꺼내 입고 서있다. 두 노인네는 아마 10분 전부터 내려와 기다렸을 거다.
"야, 윤석열이는 왜 그런 말을 해냐"
차에 타자 엄마는 유튜브에서 본 동영상 얘기를 꺼낸다.
"아 정치 얘기 하지 마"
아빠가 가로막는다.
"중앙슈퍼 아줌마 징하게도 고생했지. 그 집 아저씨가 술만 마시면 때려서 중앙슈퍼 아줌마가 도망 나와서 내가 몇 번이나 숨겨줬어."
이번엔 어릴 적 살던 발룡리 얘기다. 발룡리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윤정이 너 A 알지?"
"나는 모르지"
"모르냐? B네 오빠 A. A가 회사에서 미국으로 발령 났대."
"아, 그래?"
A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대꾸는 한다.
"C 씨는 뭐 하고 산대요?"
엄마는 대뜸 아빠의 회사 동료였던 C의 근황을 묻는다.
"몰라. 뭐 자격증 맡기고 용돈 받아서 지낸다는 거 같지 아마."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다.
전곡 선사박물관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전곡 선사박물관에 먼저 들렸다. 2층에 올라가니 5천 년 전 빙하에 묻혀있던 미라의 모형이 있다.
"거죽이 그대로 붙어있다. 키도 쪼끄만 하네. 이거 진짜 아니지?"
엄마는 이제 판단력도 흐려졌다.
"여봐. 이리 와. 여기 앉아서 이거 비디오 봐."
아빠는 엄마를 불러댄다.
다른 관으로 옮겼다. 거기엔 매머스, 호랑이, 사자, 코뿔소 등 짐승들 박제 모형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북경인 등 인류의 진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번에 거기 어디냐, 윤정이 너랑 갔던데. 거기 호랑이 털은 엄청 뻣뻣했는데 이건 부드럽다."
호랑이 박제모형을 쓰다듬으며 엄마가 말한다.
"이 코끼리는 엄청 크네."
"엄마 그건 매머스라는 건데 코끼리 조상 같은 거야."
내가 설명한다.
"여봐 이리 들어와. 사진 찍게."
아빠는 움막 같은 곳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싫어. 나는 사진 안 찍어요."
"아, 찍어. 사진을 찍어야 나중에 왔다 간 걸 알지."
엄마는 아빠의 성화에 주춤주춤 움막 안으로 들어선다.
"하나, 둘, 셋! 개구리 뒷다리~"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정원에 작은 분수가 켜져 있다.
"윤정아 나리꽃이다. 참, 이쁘다~ 이거 다 심은 거지?"
엄마는 조경으로 심어놓은 백합과의 나리꽃을 보며 좋아한다. 엄마는 꽃을 좋아한다.
연천 작은 책방
다음 목적지인 연천에 있는 작은 책방으로 향했다. 집을 개조해서 만든 책방 겸 카페 겸 빵집이다. 그곳에선 사장님 부부가 커피와 빵도 판매하신다.
"엄마아빠, 뭐 드실래요? 나는 오늘 커피를 안 마셔서 커피 한 잔 마실 거야."
"커피 말고 뭐 있어?"
"어머님, 꽃차, 홍차, 생강차 있어요."
사장님이 상냥하게 대답해 주신다.
"나는 생강차 따뜻하게"
친구들 만날 때 카페에 몇 번 다녀본 아빠는 먹고 싶은 걸 주문한다.
"엄마는?"
"쌍화차나 대추차는 없죠"
"없다고 했잖아. 꽃차나 홍차 마실래?"
"안 먹을래."
"사장님 물 마셔도 되죠?"
엄마가 책방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요. 어머님. 당연히 되죠."
엄마의 마음을 눈치챈 걸까. 사장님이 호탕하게 대답하신다.
카페에 가는 걸 돈 아까워하는 엄마는 결국 마실 걸 주문하지 않았다.
나는 빵과 차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 집이 참 예쁘다. 잘 꾸며 놨네.‘
엄마가 말한다.
’이 집이 한 40년은 됐겠고만, 윤정이 애기 때 발룡리 살던 그 집이랑 비슷하잖아. 사장님 이 집 40년쯤 됐죠?‘
아빠가 사장님께 묻는다.
’네, 그쯤 됐을 거예요. 이 집이 새마을 표준주택설계모델이래요.’
사장님이 커피를 내리며 아빠 말을 귀 기울여 듣다가 대답한다.
빵과 차가 나왔다. 엄마는 소금빵과 감자치즈올리브빵을 맛있게 먹는다. 엄마가 이런 슴슴한 빵을 좋아할 줄 몰랐는데, 좀 더 시킬 걸 그랬다. 우리가 주문한 뒤 손님들이 몰려들어 몇 개 더 주문하려고 보니 남은 빵이 없었다. 빵을 먹는 엄마에게 아빠가 아빠의 생강차를 권한다.
"목 막혀. 한 모금 마셔."
엄마가 아빠 생강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지?"
"맛있네. 우리 윤정이가 하고 싶은 게 이런 거지?"
어떻게 알았지? 이럴 땐 우리 엄마가 귀신이다.
계산을 하고 나서려는데 아빠가 카드를 사장님께 내민다.
"아, 이걸로 해주세요. 딸들하고 밥 먹으면 항상 제가 사요."
그럴싸한 허세를 부리는 건 아빠의 자존심이다.
나오는 길에 엄마는 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가자고 했다. 엄마가 먼저 사진을 찍자고 하는 일은 드문데 집이 퍽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열쇠 전망대까지 보고 연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올 때보다 조금 더 밀렸다. 뒷자리에 앉은 엄마가 말한다.
"윤정이 운전하느라 힘들지?"
"아냐, 괜찮아."
"엄마 인제 이런데 안 올래."
"왜? 박물관이랑 열쇠전망대 별로였어?"
"아니. 그거 볼만하더라."
"그 책방 재미없어?"
"아니, 거기 집이 진짜 이쁘더라, 빵도 맛있고."
"그런데 왜 다음엔 안 와?"
"다음엔 하지 마. 우리 딸 운전하느라 힘들어서 안 할래."
효도하러 왔다가 사랑만 받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