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서울에 잠깐 나가 있을 때였다.
하루는 잘 시간이 되자 보람이가 아빠를 찾는다.
"아빠 이야기 만들어 놓은 거 있어? 이야기 듣고 싶은데.."
좀 뜬금없다...
"음.. 아직 만들어 놓은 게 없는데 다음에 들려주면 안 될까?"
"즉석으로 만들어서라도 들려줘. 오늘 듣고 싶단 말야."
맡겨놨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하나 만들어 들려주기로 했다. 어쩌다 갑을 관계가 됐을까..물론 아빠가 을이다.
"그래... 그럼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미완성이지만 한번 들어볼래?"
"응"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의 숲 속에 어두컴컴한 동굴이 있어요. 이 동굴은 햇볕이 안 들고 먹이도 없어 사람들도 동물들도 살 수 없는 아주 척박한 환경이었어요. 그렇지만 이 동굴에서 살아가는 동물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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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보람이가 끼어들었다.
"맞아! 어떻게 알아?"
"헤헤 그 정도는 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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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굴은 박쥐들의 천국이었어요.
온통 박쥐들로 뒤덮여 있었죠. 박쥐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사냥을 나가서 먹잇감을 구해와 여기서 살았어요.
근데 동굴 아래는 찐덕찐덕 거리는 늪처럼 돼 있었는데,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악취가 진동했어요. 이 늪은 다름 아닌 박쥐들의 똥과 진흙, 그리고 동굴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섞여 만들어진 늪웅덩이였어요. 그래서 새끼 박쥐들이 여기에 떨어지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기도 했죠.
이 동굴에는 박쥐 말고 어미 물왕도마뱀과 새끼 물왕도마뱀이 살고 있었어요. 이 물왕도마뱀들은 동굴 속의 작은 동굴 같은 구멍에서 살고 있었어요. 이 물왕도마뱀들의 먹이는 다름 아닌 박쥐였어요. 천장에 매달린 박쥐들이 너무 많아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다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힘없는 새끼 박쥐나 늙은 박쥐가 떨어져 빠지게 되면 그대로 무덤이 되었어요. 이 늪 같은 웅덩이는 박쥐 똥과 진흙으로 돼 있어 찐득찐득해서 한번 빠지면 다시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죠.
"불쌍해"
보람이가 탄식을 한다.
새끼 박쥐가 물에 빠지면 물왕도마뱀이 잡아먹기 위해 얼른 달려들어요. 물왕도마뱀은 물에서도 늪에서도 육지에서도 잘 다닐 수 있는 동물거든요. 그래서 이런 찐득찐득한 늪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죠. 그래서 진흙과 똥으로 떡칠이 되어 허우적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새끼 박쥐를 덥석 물어 그 자리서 잡아먹거나 물어서 새끼 물왕도마뱀한테 가져서 먹이고 있었어요.
보람이가 다시 끼어들었다.
"도마뱀들은 꼭 그렇게 가엽고 더러운 걸 잡아먹어야 해? 밖에서 살면 안 돼?"
"글쎄, 물왕도마뱀들은 왜 이런 곳에서 살까? 더럽고 힘든 환경이지만 밖에서 사는 것보다 나으니까 살겠지?"
"불쌍해.."
진심이 듬뿍 담긴 걱정이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미 물도마뱀은 그렇게 잡은 먹이로 새끼 물왕도마뱀을 먹였어요. 그리고 남으면 자기가 먹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새끼 물왕도마뱀도 무럭무럭 자랐어요.
이제 새끼 물왕도마뱀은 혼자서 사냥을 해도 될 만큼 자랐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새끼 물왕도마뱀은 사냥을 나가지 않았어요.
엄마가 잡아온 먹이만 먹고 좀처럼 집을 나가지 않았어요. 가끔 목이 마를 땐 물이 흘러내리는 곳까지 나가 낼름낼름 물을 핥아 마시고는 바로 좁은 집으로 돌아왔어요.
엄마 물도마뱀은 걱정이었어요. 이제 혼자서 사냥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보람이가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니 이제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해야지. 언젠간 자기 혼자 해야 하잖아!"
그렇지??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겠니? 라고 보람이한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서 한 동안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기도 해 봤어요. 그러면 사냥을 시작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픈 대로 그대로 지내는 거였어요.
그러다 죽을 거 같아 어쩔 수 없이 다시 어미 물왕도마뱀이 먹이를 잡아다 주었어요.
그러든 어느 날이었어요.
새끼 물왕도마뱀이 아침이 일어났는데, 어미 물왕도마뱀이 없었어요.
'어, 엄마가 없네.' 조금 있으면 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어미 물왕도마뱀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참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집 밖 동굴로 나가 보았어요. 여전히 박쥐들이 시끄럽게 소리 내 울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미 물왕도마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보람이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끼어들어다.
"잠깐! 이거 혹시 새드엔딩이야???"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지 보람이가 따지듯 물었다.
"음... 아직 결론은 못 정했는데 아마 그럴걸..."
"아 싫어! 새드 엔딩은 싫어. 해피 엔딩으로 해줘!"
"그래? 그러면 좀 더 생각해 봐야겠는데.. 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 생각해서 들려줄까?"
".. 어쩔 수 없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끝까지 안 듣길 잘했다는 말투로 잠을 청했다.
이 스토리는 인도네시아의 한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박쥐와 물왕도마뱀에 대한 실제 동영상을 참고로 조금 꾸며서 들려준 얘기였다. 똥반 물반의 늪에 떨어져 죽는 새끼 박쥐, 그리고 그걸 먹고사는 물왕도마뱀. 처절하지만 자연 속의 현실이다. 뭔가 스트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내가 소설가라면 소설로 써보고 싶은 정도였다.
보람이에게는 조금 잔인할 수 있지만 스토리로 만들어 한번 들려줘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제대로 스토리를 만들지 못했는데, 아무 이야기라도 들려달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 들려줘봤다.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별로 재미없을 테니까 새끼 물왕도마뱀과 어미 물왕도마뱀을 등장인물로 설정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봤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귀를 쫑긋 기울이고 감정이입을 해가며 들었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는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근데, 초등학교 4학년 보람이는 왜 새드엔딩이 싫은 걸까? 이 나이 때는 모두 해피엔딩만을 바라는 걸까? 세상이 항상 해피하면 좋겠지만 그런 세상은 없다. 그런 걸 조금씩 깨닫기 시작해서 새드엔딩은 싫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