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 머무른 순간들

쓸모와 무관한 시간을 보낼 때 삶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by 경년

자기 계발, 운동, 독서 하물며 쉬는 것까지도 우리는 시간에 효용과 이유를 붙인다.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남들보다는 열심히 살고 있는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껴 썼는지.. 늘 우리는 시간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잘 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 말들을 무의식 속에서 계속 되뇌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하루에는 묘한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가만히 있는 순간에도 어딘가 불안하고, 쉬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쉬지 못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행복했다고, 아름다웠다고 떠올리는 추억들을 생각해 보면 그 장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날들과는 사뭇 달랐다. 정작 우리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소중한 기억들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순간들이었다. 쓸모를 따지던 시간도,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분주하던 순간도 아니었다.


바로 이런 순간들이었다.

나의 낭만을 대신해줘서 고마워요 / 5월의 한강 / 만개한 벚꽃
강에 비친 달빛 / 바닥을 가득 메운 낙엽 / 구름 사이 새어나오는 햇빛
완벽한 그라데이션 / 오리가 흩뿌리는 윤슬
비오는 제주에서의 재즈
퇴근길에 마주하는 만개 / 완벽한 후라이 / 여름을 알리는 녹음
뜻밖의 메밀꽃밭 / 대롱 다리에 걸쳐있는 보름달
3월 봄, 토요일 브런치와 계획에 없던 낮술
월정리 앞바다 / 한강에서의 낚시 / 빛나는 분홍 구름


지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문득 생각나는 장면들을 마구 올려본 것이다. 이 사진 속 순간들은 좋고 나쁨으로 쉽게 나눌 수 있는 경험도 아니었고, 생산성을 따져 평가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의도하지 않았고,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으며,
눈앞의 것들을 분석하려 들지 않았을 때
조용히 일어나던 순간들이었다.


그저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했던 순간들이었고, 어딘가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지금 그 순간에 오롯이 존재할 수 있게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런 기억들은 유난히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구름이 흘러가는 속도, 봄에 비치는 햇살과 겨울이 올때즘 콧 속이 시큰해지는 바람. 비 오는 날 운 좋게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재즈 같은 것들. 매일 스쳐 지나던 출근길 어딘가에서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작고 귀여운 것들을 문득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오늘 기분이 좋네” 하고 넘겼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었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자각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일깨워지는 순간에 작은 희열을 느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을 때나, 생각을 붙잡아 두고 싶어질 때도 대개 이런 감각을 깨달았던 순간 이후였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 글은 늘 비슷한 결론과 방향으로 돌아온다.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머물렀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런 생각들이 내 시간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는데.


어쩌면 삶은 앞으로 얼마나 나아갔는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또렷하게 존재했는지로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머물렀던 순간들 덕분에 비로소 내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