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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14. 2022

새해맞이

터키(D+316) 12월의 마지막 날 - 카르스



-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마침내 냉장고가 텅 비었다. 엊그제 사놓은 달걀 한 판은 그 껍질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응당 이럴 운명이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던 건 달걀뿐이었으니까. 같이 사는 친구들은 이따금 주방으로 나와서는 배가 고픈지 무심결에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냉장고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러는 걸 보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온 이 유학생 친구들은 돈에 쪼들렸다. 모두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결코 많은 돈을 벌 수가 없었다. 학생 비자로 일을 하는 건 불법이었기에 그들은 막노동 같은 힘든 일을 하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임금을 떼먹히는 경우 또한 심심찮았다.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는 가족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 년 전인가 투르크메니스탄 정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국에서 해외로의 송금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터키에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경우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락으로 빠져가는 터키의 경제를 생각하면 크게 의지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우리는 매일 식용유에다가 감자와 양파, 당근 따위를 볶고 물과 파스타를 넣어서 끓인 국물 요리를 먹었다. 쿠루 파슐리에(Kuru Pasulye, 토마토 소스를 넣고 볶은 콩 요리)와 필라프 같은 음식을 해먹기도 했지만 어쩌다가 한 번일 뿐이었다. 생명연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만 먹어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우리는 ‘로빈손 크루소’가 아니었다. 주변에 널린 게 슈퍼마켓이고 청과물 가게인데 돈이 없어서 입에 풀칠만 해야한다는 상황이라니.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조차 조미료가 없을 뿐이었지, 고기도 먹고 생선도 먹고 산열매도 먹고 아주 야무지게 먹었는데...


그러던 중, 국물 요리를 만들 식용유마저 바닥을 보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나는 과연 이 친구들이 한 개에 1.25리라 하는 에크맥을 살 돈은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이들의 밥상에 에크맥이 없다는 건 우리나라로 치면 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걱정은 나만의 기우였을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도 집 안에서 담배 연기가 그칠 날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굶주린 배를 홍차로 달래 가며 담배만큼은 끊임없이 피워댔다. 그러고는 밤이 깊어가도록 웃고 떠들며 두라크(러시아의 유명한 카드 게임)를 했다.


훈훈하고 넉넉해야 할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빈곤하게 지나가 버렸다. 터키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으니 딱히 아쉽거나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연말이 다가오자 집안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같이 살던 친구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각자 150리라씩 거둬서 연말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응. 좋지. 뭘 살 예정인데?”
“요즘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음식을 좀 사고 파티니까 술도 좀 사려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서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새해맞이 또한 없다. ‘없다’라기보다는 새해맞이 축하를 부정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하지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온 이 친구들은 달랐다. 투르크메니스탄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과거 구소련의 영향으로 그 관습이 터키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술도 곧잘 마셨고 젊은 여성들은 대부분 히잡을 쓰지 않았다.


한동안 내 사재를 털어가며 이 배고픈 중생들을 구제하고 있던 내게는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마침내 집구석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기뻤다. 비록 한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다 같이 마음껏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순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장보기를 마치고 난 후, 그들이 내게 보여준 영수증을 보고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술값만 400리라였다.  대책 없는 인간들은 방구석에서   조각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모은 돈의 절반 가까이 술값에 써버렸다. 그것도 사자의 젖인지 뭣인지  맛대가리도 없는 라키(터키의 대표 증류주) 따위를 사는데 말이다. 현기증이 났다. 커다란 봉지에는  이외에 탄산음료와 사탕, 과자와 같은 무수히 많은 군것질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것들은 분명 음식이지만 내가 원하던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미치고 환장할  같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나마 엄청난 양의 감자, 양파와 함께 10리터 짜리 식용유가 있다는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12월 31일 밤이 되었다. 우리는 거실 바닥에 식탁보를 길게 깔고 그 위에 음식과 술을 차렸다. 우리 자신을 위한 차림이기도 했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풍성한 음식과 달콤쌉싸름한 술 앞에 모두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친구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가족 한 명 한 명과 화상통화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느라 바빴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들은 물질적으론 조금 부족해도 정서적으로는 부자인 친구들이었다.

   

그러던 중, 기다리던 손님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모두 투르크메니스탄 출신 유학생이었다. 안 그래도 조그마한 집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발 디딜 틈도 없어졌다. 여자들까지 합세하고 나자 정말로 연말 파티 분위기가 느껴졌다. 남녀가 다같이 끈적하게 뒤엉키고 취하고 망가지는, '마시고 죽자' 식의 파티는 아니었다. 정확히 그 반대의, 이보다 건전할 수 없는 파티였다. 자기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앉아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주고 받는 식의 파티. 밖은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졌지만 이곳은 훈훈하다 못해 덥기까지 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즈음, 한이 내게 말했다. 한은 제임스싯과 함께 이 집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잠깐 나랑 어디 좀 같이 갔다 오지 않을래?”
“갑자기 어딜 가는데?”
“친구 집에 가려고. 초대를 받았는데 너도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서.”


재미있을 거 같았기에 나는 순순히 한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조용한 밤거리를 걸었다. 주변의 집들에서는 커튼에 가려진 창문 사이로 희미한 불빛만이 일렁일 뿐 연말연시를 축하하는 기색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내가 사는 곳에 족히 열 배는 되어 보이는 큰 집이었다. 사람들이 열댓 명 정도 모여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천장을 풍선으로 꾸며놓은 널찍한 거실에는 주방을 뒤집어서 탈탈 턴 것마냥 수많은 음식이 있었다. 빵과 과일, 치킨, 손수 만든 만두, 샐러드, 뷔렉, 음료수, 그리고 엄청나게 큰 케이크 등. 유교식 제사상을 차리듯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 이렇게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다 내놓고 먹는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보드카를 무려 여섯 잔이나 마셨다.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그들의 실 없는 농담 때문이었는지 웃느라 입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속에서, 심지어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리도 즐겁게 어울릴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신기하다.


다시 또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한이 "슬슬 일어나자. 또 가야할 곳이 있어"라며 나를 재촉한다. 한에 의하면, 카르스의 카프카스 대학교(Kafkas University)에 다니는 투르크메니스탄 유학생은 대략 천 명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한은 소문난 마당발이었다. 우리는 밤 순찰을 다니는 사복경찰의 눈을 피해서 도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그는 나를 이런 곳에 세 번이나 더 데려갔다. 그때마다 나는 배가 터질 때까지 다시 먹고, 술 또는 차를 마셨으며, 물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상대방과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내 생애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든 날이 있었을까? 정확히 일 년 전, 나는 알바니아 슈코더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들과 클럽에서 새해맞이를 했다. 그때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춤까지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클럽 안은 너무나 시끄럽고 답답하고 방탕하고 약에 취한 사람도 많았기에 도중에 슬며시 빠져나와야 했다.


일 년 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새해맞이를 한 지금,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처럼 조용하고 안락한 집 안에서 새해맞이를 하는 게 좋았다. 광란의 밤보다는 평화의 밤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몸을 흔들기보다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 내 영혼에 더 가까운 일이었다.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과 함께 한 건 이런 이유에서 일테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어있었다. 거실은 식기와 남은 음식, 쓰레기, 빈 병 등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난장판 속에서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그대로 쓰러졌고 잠이 들었다. 한 며칠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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