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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호 Aug 19. 2022

아리따운 여성을 찾아서

터키(D+461) 5월의 어느 날 - 카르스 ~ 호라산



- 5월 중순이 되자 마침내 산꼭대기에 남아있던 마지막 눈까지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카르스를, 터키를 떠나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이 년 가까이 지속된 자전거 여행을 마무리하고 그리운 한국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카르스를 떠나기 하루 전, 나는 카르스 성에 올라 이 도시에 작별 인사를 고했다. 지난해 4월, 카르스에 도착했을 때 이 외딴 도시에서 9개월이나 지내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흘러가는 대로 달리다 보니 이곳에 와 있었고 흘러가는 대로 지내다 보니 친구도 생기고 소중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여행에는 과연 정답이란 게 없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그건 여행은 우리네 삶처럼 조절하고, 적응하며, 받아들이는 것의 연속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카르스의 전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 땅을 다시 밟는 날이 올까? 쉽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 지구가 아무리 작아졌다고 한들 우리에게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곳이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카르스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나는 분명 언젠가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산책을 하다가 이곳의 풍경과 냄새,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겠지. 그러나 영원히 잊진 않을게, 카르스. 너는 이제 나의 또 다른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었기에 그날 밤 투르크메니스탄 친구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바이람은 이별을 특별히 아쉬워했다. 그는 내가 자전거로 지나가게 될 사리카미스(Sarıkamış)란 마을 근처에 최근 곰이 출몰해 사람을 공격한다면서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그가 보여준 동영상에는 거대한 곰 한 마리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는 사람을 무섭게 쫓아가고 있었다.


바이람은 귀신에 홀린 듯 그 동영상을 수없이 돌려보았다. 한동안 집 안에서 곰에게 쫓기는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건 바이람의 마음을 동요시킨 게 분명했다. 그는 갑자기 내 바지 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떠나지 말라고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꼭 떠나야 한다면 돈을 줄 테니까 버스를 타고 가란다. 떠나지 않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뜬금없이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두호. 나 너네 나라가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지 뉴스에서 많이 봤어. 혹시라도 돈이 필요하다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


그 말은 참 고마운 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너,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북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있는 건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내게 북한에 대해서 유난히 많이 물어보던 그였다. 요전에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북한에서는 누군가 코로나에 걸리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바로 쏴 죽여?"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괜히 입만 아플 거 같아서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인데 남조선에서 왔든 북조선에서 왔든 무슨 상관이겠어.


다음 날, 카르스를 벗어난 순간 나는 지금 이 시기야말로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자전거를 타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맑은 하늘 아래 그림처럼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봄기운을 가득 품은 초원과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산들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은은한 꽃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고 겨울 동안 사라졌던 가축들이 다시 나타나 산천을 거닐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풍경이었다.


떠나고 이튿날 저녁 무렵, 호라산(Horasan)에 도착한 나는 야영 장소를 찾고 있었다. 도로 옆 들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커다란 천막을 치고 머무르고 있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보따리장수였다. 터키는 땅덩어리가 꽤 크다 보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 보따리장수들은 대부분 가난한 터키 동남부 출신으로 낡은 승용차나 조그마한 트럭에 옷, 커튼, 테이블보 따위를 가득 싣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판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장사꾼 혼자가 아닌 온 가족이 함께 이동한다는 것.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초대받은 내 앞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버지, 어머니, 딸 셋, 아들 둘까지 대가족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온종일 자전거를 타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범벅이가 된 나보다 더 꾀죄죄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 보였는데 학교는 다니고 있는 걸까?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가 음침하면서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눈빛. 날 초대해 준 건 분명 고마운 일이지만 이 근처에서 야영하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았다.


그곳에서 나온 후, 다른 야영 장소를 찾기 위해 시골길을 달리며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들판을 둘러보고 있었다. 갑자기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안에는 60대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타고 있다. 그는 자기 집으로 오라는 신호를 나에게 보낸다. 내가 'Ne kadar uzak?(얼마나 멀어요?)'라고 묻자 그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보인다. 반경 500m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걸로 보아 저 다섯 손가락은 5km를 뜻하는 거 같았다. 피곤해 죽겠는데 5km나 더 달려야 한다고? 게다가 한눈에 봐도 오르막길이잖아. 머릿속에서 어떻게 할까 저울질을 하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즉시 5km가 되었든 500km 되었든 그의 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리따운 여성을 만날 수 있다면 지옥이든 어디든 갈 수 있... 음... 이게 아니다. 내 경험 상 집에 여성이 있다는 건 더 안전하다는 증거이자 정갈한 집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표시이니까.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어 도착한 마을 입구에는 자전거를 탄 한 소년이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아저씨의 아들이란다. 나는 그를 따라 달렸고 곧 한 농가가 나타났다. 넓은 마당과 외양간, 창고, 작업실, 빵을 굽는 탄두르 그리고 예배실 등이 딸린, 터키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가였다. 


집안으로 들어선 나는 곧바로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터키 가정의 응접실은 보통 집에서 가장 밝고 화려한 곳이다. ‘손님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말이 있을 정도로 손님맞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터키인들은 응접실을 꾸미는데 온갖 정성을 다한다. 내가 안내받은 응접실은 과연 그 말에 털끝만큼의 거짓도 없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응접실은 그리 넓진 않았지만 참 눈이 부시는 곳이었다. 벽지는 금색이었고 한눈에 봐도 고가의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가구들도 하나같이 아주 고급스러웠다. 소파는 임금님의 용상처럼 황금빛으로 번쩍 빛났고 오동나무로 만든 탁자는 고풍스럽고 단단했다. 하얀 테이블보 레이스에 수 놓인 꽃들은 봄을 맞아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응접실의 화려함 따위 예고편에 불과했다. 터키 가정에 손님이 방문하면 온 가족이 나와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함께 차나 커피를 마신다. 곧 응접실에 집주인 내외와 함께 나를 마중 나와 준 소년이 나타났다. 이후, 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집에서 머무른다는 다 큰 여성까지 딸만 무려 다섯 명이나 나타났다. 심지어는 출가한 딸이 두 명이나 더 있단다.


딸들은 내 존재에 환호했다. ‘안녕하세요’라고 내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는 자기들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렇겠지. 한국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BTS나 블랙핑크를 좋아하겠지. 이제는 안 봐도 뻔한 비디오지만 이런 귀여운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받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정갈한 집밥을 얻어먹고 차도 한 잔 마신 다음, 나는 10시쯤 되어 이제 자러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터키 가정집에 초대받으면 한 가지만 기억하자. 터키 사람들은 절대로 먼저 손님을 물리치지 않는다.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하지 않으면 그들은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당신 옆에서 손님 접대를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집 밖의 예배실로 안내되었고 그곳에는 포근한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리따운 여성은 과연 몇 번째 딸이었을까를 고심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오자 고등학생인 '하티제'가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집안의 모든 가족 구성원은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투박하고 단조로운 색의 히잡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꿈과 야망에 가득 찬 소녀였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중매결혼을 한 두 언니와는 달리 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직업여성으로서 경력을 쌓고, 신랑감도 스스로 찾고 싶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나처럼 넓은 세상을 보기를 원했고 외국어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녀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아버지의 태도였다. 아버지는 그녀가 유학이나 여행 따위의 이유로 멀리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그 이유는 오직 결혼이 아니고서는 안 될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꽃과 나무와 하늘 등 이곳의 자연을 사랑했으며 책을 좋아하고 공부도 잘했다. 좋은 친구들도 많다고 자랑을 했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집안일도 곧잘 돕는다고 했다.


나는 무슨 질문에도 솔직하고 명석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내심 놀랐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신’이라는 고귀한 믿음을 가진 여타 사람들처럼 그녀 또한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성숙해 보였다. 사람을 그 나이보다 성숙하게 만드는 요인은 대체 뭘까? 신앙심? 자연? 독서? 책임감? 부모의 가르침?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성숙한 소녀란 무척이나 아름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후, 하루 더 머물고 가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터키식 인사법에 따라 웃어른에게 존경을 표한다는 의미로 아저씨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손등을 내 이마에 대었다. 그리고 하티제에게는 이제는 마지막 하나 남은, 한국에서 사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말이 선물이지 그건 한국에서 열 개에 오천 원 주고 산, 한복 입은 소녀 모양의 조그마한 자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별 볼 일 없는 선물을 받아 들고는 들국화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매우 기뻐했다.


그녀는 혼자서 집 밖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나를 끝까지 배웅해 주었다. 나는 어제 힘들게 올라왔던 5km의 오르막길을 기분 좋게 내려갔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여성이 누구였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아리따운 여성을 만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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