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과 '구독'을 벗어나기 위해
2025.7.27.
(들어가기 전 잡담)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게 정말로 형편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공들여 정독을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책 속의 한 구절, 한 문장 생각나지 않으니 이건 그야말로 '깨진 장독에 물 붓기'나 다름 없다. 물론 책을 읽음으로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거나 가치관이 달라지는 점 등 여러가지 이점도 있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책을 읽고 책 속의 근사한 한 구절, 한 문장 인용하며 유식한 척도 하고 싶다. 이 정도 속물적인 기질은 뭐 괜찮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어렸을 적부터 그랬지만 나는 내 생각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데 서툴다. 머리가 썩 좋은 것도 아니면서 생각이 내뱉는 말을 앞지르고, 내뱉은 말도 어눌한 발음으로 인해 이상한 소리가 되며,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를 주로 써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기억력이 나쁜 건지 때때로 적절한 한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이걸 한국어로 뭐라고 말하지?'라며 상대방에게 묻곤 한다.
영화 '노트북(2004년)'의 남주인공 '노아'는 어렸을 적 말재주가 너무 없어서 시를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말재주가 일취월장하여 어여쁜 '앨리(여주인공)'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이제 가정이 있는 몸으로서 여자를 꼬시기 위해 내 말재주를 사용할 일은 없다. 하지만 지위와 권력 없이도 단순히 올바른 지식과 논리, 적절한 단어와 주장으로 내 의견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고 싶은 욕구는 언제나 대나무처럼 한결 같았다.
'노아'처럼 시를 읽는다는 건 도무지 내 스타일이 아니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글을 써보면 어떨까?'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을 쓴다는 건 머릿속에서(어쩌면 심장 속에서도) 분열과 생성을 반복하는 무질서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자 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단어와 문장을 보기 좋게 조합하는 과정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어휘력을 높이며 내 경우는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걸 좋아하기에 발음/발성 연습도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
여기까지가 글을 쓰기로 한 나의 이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글을 쓸 당시의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 중 하나. 세상의 그 누구도 미래의 '나'를 볼 순 없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새순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고 믿는다.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건 미래의 '나'에게 주는, 기억과 감정이 가득 담긴 소중한 선물이랄까?
(본문)
최근 사회 문제를 다룬 책을 주로 읽고 있다. 그 많은 사회/교양 서적 중 읽을 만한 책 고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제목 보고 '이거다!' 싶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구경'이 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디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나만 해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짬이 날 때마다 소셜 미디어를 켜고 '구경' 스킬을 시전하고 있으니. 하지만 구경은 어디까지 구경으로 끝날 뿐이다. 5분 전에 봤던 전쟁의 참상은 현재 보고 있는 '축구 챔피언스리그 하이라이트' 동영상에 잊혀지고 이것도 얼마 뒤 더 새롭고 자극적인 영상에 잊혀진다.
그 많고 다양한 정보가 그저 머릿속을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다. 당연히 정보와 함께 전해오는 감정들도 심장을 스쳐지나간다. 전쟁 난민에 대한 연민도 가난한 노인들의 외로운 삶을 엿볼 때의 슬픔도 지독한 취업난을 겪는 대한민국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수증기처럼 금새 사라진다.
이런 작금의 상황에서 우린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그만두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알고리즘과 구독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알고리즘과 구독이란 게 오랜 세월을 거쳐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랑 조화롭게 결합하면 그것이 '가치관'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즉, 어쩌면 알고리즘과 구독에서 빠져나오라는 건 기존의 가치관이 아닌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라는 굴레의 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관성이란 그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벗어나기 거부하기 힘든 법이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다 똑같다. 그 어떤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결심했다. 평생동안 그 어떤 일에도 답이라는 걸 갖지 않기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의 주장처럼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화뿐이다'를 믿으며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즉, 알고리즘과 구독 자체를 거부하기로. 이렇게 거부하는 게 또 다른 알고리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
다음으로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갖는 것! 사실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라는 건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다. 돈만 있다면 누구나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시대이다. 집에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며 혼밥/혼술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Chat GPT와 외국어 회화를 연습하고, 가끔 배낭 하나 매고 가벼운 마음으로 해외여행도 갔다 오고. 이 시대는 혼자 해도 즐거운 일이 무궁무진하다. 혼자 살기에도 바쁜데 타인의 삶 따위 신경 쓸 시간 여유가 없다.
또한 현대인들의 손익 계산 능력은 그 얼마나 뛰어나던가? 공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서도 금전적으로 심지어는 감정적으로도 이득과 손해를 철저히 따진다. 그리고 그 관계가 손해라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비정하고 외로운 시대에 인간성을 믿으라고?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인간성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의 경험적 근거에 의해서다. 수 년 전,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나라는 사람을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런 도움의 행위는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맹자가 말했듯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보며 측은지심을 갖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걸 여행을 하면서 깨달았다.
그 사람들을 본받아 앞으로 죽을 때까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이미 필요 이상의 대가를 받았다. 항상 나를 사랑해고 보살펴 준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여행지에서 만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기후 위기, 전쟁, 식량난, 난민 문제, 물부족 등 그 어느 때보다 지구촌의 모든 인간이 서로 협력하고 돕고 배려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거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자신의 구독과 알고리즘에서 벗어나고 한 번 잃어버렸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바라본다.
-마음에 들었던 책 구절-
1. 변변한 난방 기구 없이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지내는 독거노인. 그런 생활을 정치인이나 기자가 며칠 간 심지어는 하루 동안 '체험'해 보는 뉴스. 이 뉴스들이 정말 약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를 끝내지 못했기에 뉴스는 계절상품처럼 반복되고, 문제가 지속되고 있기에 반복에 대한 타당성을 얻는 기묘한 순환에 갇혀있는 듯하다.
2.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3.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고쳐져야 하는 건 보이는 인프라나 환경만이 아니라 이들을 어둑한 땅속으로 밀어넣고서 깐깐한 고용주라도 된 것처럼 노동과 쉼을 고작 자신의 눈에 띈 장면만으로 평가하는 무례함이다.
4. 인간의 선함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거나 교육을 아주 잘 받은 집단에서보다, 혜택을 누리지 못한 계층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는 걸 귀납적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5. 나, 나의 가족, 나의 친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6. 페이스북을 만든 메타 최고 경영자 마크 저커브그는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당장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는 다람쥐가 더 큰 관심사일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략) 더구나 개인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한 소셜미디어를 주축으로 뉴스의 소비가 극도로 개인화되고 에코 체임버 효과(폐쇄된 환경에서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소통하며 기존의 신념을 증폭하거나 강화하는 현상)에 갇히게 된 시대다. 나에게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와닿지 않은 뉴스는 점차 존재하지 않는 뉴스나 마찬가지가 되어가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에게 '신경 쓰이는' 뉴스만이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
7."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마리 콜빈의 말이다.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짤막한 소식의 파편들을 들고 한계가 분명히 보이는데도 이걸 왜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곰곰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보다 오히려 더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반응의 자유' 쪽이다.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 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