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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lan is the best plan

가지안테프 근처

by 자전거

터키(D+225), 9월의 어느 날 - 가지안테프 근처



- 저녁 어스름, 어디선가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과 북, 플롯의 조화로운 화음이 소나무가 빽빽한 공원 사이로 울려 퍼졌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연주자들은 함박 미소를 짓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는다.


“가지안테프는 처음이니?”
“응. 처음이야. 맛있는 먹거리가 많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그럼! 터키에서도 먹거리 하면 가지안테프지.”
“혹시 뭔가 추천해 주고 싶은 음식이 있어?”


연주자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작은 불협화음이 생긴다. 여러 가지 음식명들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다들 이게 맛있다 저게 맛있다 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터키 사람들에게 가지안테프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나오는 한결같은 반응이다. 터키 사람들은 ‘음식에는 빈부가 없다'라고 말하지만 역시 취향 차이는 확실한가 보다.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마틴과 베로, 나는 입이 귀에 걸려 있다. 내일이면 이 모든 걸 다 먹을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배낭여행자들은 흔히 ‘No plan is the best plan’이라 말한다. 마틴과 베로를 만난 이후, 발길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우리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운 좋게도 최고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일은 달랐다. 내일이야말로 우리에게 계획이 필요한 때였다.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계획을 세워야겠지?”
“아마도? 돈도 시간도 그렇게 넉넉한 게 아니니까.”
“마침내 우리도 여행 계획이라는 걸 세우게 되는구먼.”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던가? 밤이 늦도록 머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였지만 누구도 피곤한 기색은 없다. 오히려 눈빛은 이글거리고 콧구멍은 벌렁거린다. 마틴과 베로와 벌써 한 달 넘게 여행을 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이처럼 흥분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돈도, 권력도, 종교도, 축구도, 심지어 그 귀여운 고양이조차도 모든 인류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없다는 걸.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딱 하나, 맛있는 음식을 제외하면 말이지.


마침내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행복감에 젖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완벽한 계획은커녕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거라는 걸.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찾은 베이란(Beyran) 가게. 베이란은 가지안테프의 전통 요리로 주로 아침 식사로 많이들 먹는다. 신기하게도 생김새와 맛이 육개장과 거의 흡사하다. 고향의 맛이 사무치게 그립던 나는 ‘베이란, 베이란’ 노래를 부르며 여기까지 왔더랬다.


베이란은 육개장처럼 빨개야 정상이다. 한데 개 밥그릇처럼 생긴 넓적한 식기에 담겨 나온 베이란은 사골 국물처럼 뽀얗다. 함께 주문한 파차 촐바쉬(Paça çorbası)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일단 한 입 떠먹어 본다. 퉤 퉤 퉤! 이게 뭐야, 먹다 남긴 감자탕 뼈다귀보다도 못하잖아. 실망감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나는 짐짓 괜찮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마틴과 베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한국 사람만큼 매운 걸 좋아하고 또 잘 먹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만큼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차마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매운맛 저항력 제로. 고춧가루 한 스푼만 들어가도 매워서 입이 돌아간다고 하니, 어찌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한 연유로 베이란을 맵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주방에서는 아예 고춧가루를 빼버린 모양이다. 내 심정도 모르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마틴과 베로는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징징거린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던 거야? 생각보다 맛이 너무 없는데?”


당연하지, 이 작자들아. 육개장에 고춧가루를 빼면 맛이 있겠니?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 맞나 보다. 마틴과 베로를 만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드릴 땐 언제고 나는 식사 시간 내내 매운맛도 모르는 이 파렴치한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어제 세운 우리의 완벽한 계획에는 ‘오전 시간-자전거 정비’가 있었다. 얼마 전에 내 자전거 바퀴를 살펴본 마틴은 자전거 허브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팔랑귀인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가지안테프 음식 탐방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오전에 자전거 가게에 들어갔던 우리는 지금 가게 셔터가 내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 해는 진작에 떨어졌고 주변은 컴컴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자전거 상태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앞뒤 바퀴의 허브를 교체해야 했다. 허브 교체는 바퀴에 달린 36개의 스포크를 탈부착하고 장력을 조절하는 세밀한 작업을 동반한다. 마틴이 가르쳐주긴 했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수리하는 데 결국 8시간이나 걸려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가 다 지나가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터키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온종일 가게의 정비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우리에게 단 한 마디 쓴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필요한 모든 장비와 도구는 물론 다과까지 대접해준다. 하지만 오늘 처음 알았다. 그 친절한 터키 사람들도 천사는 아니라는 걸.


영업 마감 시간 십 분을 남겨두고 다시 또 스포크 장력을 조절하려는 내게 가게 주인이 울분을 토해낸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문 닫고 집에 가야 한다고."


아차 싶었다. 사람은 정말로 간사한 동물이 맞나 보다. 누군가 나에게 계속 잘해주면 그걸 당연하게 여겨 버리니까. 도움을 받아도 그 도움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을, '고마워'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극혐했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꼴이 아닌가?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후다닥 정리를 하고 나오는데 가게 주인이 갑자기 우리를 불러 세웠다. 울그락불그락한 표정이 뭔가 예사롭지가 않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가 아까의 일을 계기로 참아왔던 울분과 불만이 폭발해서 우리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당당하게 말했다.


"같이 사진 찍을까?"
"응. 그래."


자전거 가게를 나오니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밥도 먹어야 하고 숙소도 구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고대했던 베이란은 완전히 꽝이었고 맛집 탐방은커녕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것도 여행의 일부라는 걸. 이렇게 잘 풀리지 않은 날조차도 하루의 끝에서 결국 몸성히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재밌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것을. 단,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날 이후 우리 중 누구도 계획이란 단어를 더 이상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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