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세상에는 ‘라온’이라는 이름의 식당, 바, 카페 등이 정말 많았다. 라온이라는 이름을 단 가게들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라온쌤을 떠올렸다.
그는 나의 네 번째 춤 선생님이었다. 스트레칭 명목으로 아이들의 다리를 마구잡이로 찢던 첫 번째 선생님. 자꾸만 안무를 까먹던 두 번째 선생님. 20분 지각하고 5분 보충 수업하던 세 번째 선생님. 다른 선생님들과 비교했을 때, 라온쌤은 그들과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다.
“어머 >_<!!!!! 안녕하세요!!!!!!”
소심하게 문 근처를 기웃대던 나를 보고, 선생님은 스트레칭을 하다만 자세 그대로 멈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요상하게 비틀린 자세였는데도 인사를 건네는 발성이 대단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크고 높았지만, 듣기 좋은 명랑함을 지닌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었다. 라온쌤은 그런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며 이쪽으로 오란 듯 크게 손짓했다.
팔다리가 정말 길구나. 그것이 라온쌤의 첫인상이었다.
우리의 첫 수업은 BTS <Permission to Dance>의 안무 일부를 배우는 것이었다.
We don't need to worry
'Cause when we fall we know how to land
걱정할 필요가 없어
추락하더라도 착지하는 법을 알고 있잖아
이 구절의 안무는 정말로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듯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안정적으로 착지한 후, 보란 듯 정면을 향해 웃어 보이는 동작이다.
이때 내 주변에는 나의 실패를 간절히 바라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저주에라도 걸린 듯 나의 삶은 정말로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쨍쨍한데 내 머리 위에만 먹구름이 있는 것처럼. 모르긴 몰라도 그때의 나는 얼굴에 ‘나 우울해요’라고 써놓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추락하듯 휘청이다가 완벽하게 착지하는 이 동작을 익히고, 처음으로 완벽히 구사했을 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실패를 간절히 바랐던 그 사람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인 듯한 그런 통쾌함.
첫 수업 이후로 우리는 꾸준히 만났다. 기분의 날씨는 쉽사리 좋아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레슨을 받는 두 시간만큼은 날이 조금 개는 듯했다. 댄스곡을 스피커가 터지도록 틀어놓고 춤을 추는 것. 그때의 나는 그 시간에 기대어 아침에 눈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색다른 제안을 했다. 주로 케이팝 안무를 배우던 내게, 왁킹 기본기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선생님은 말했다. 그의 전공이 왁킹이었다는 걸 알았던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배워보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가장 기본적인 동작을 하나 알려주겠다며, 그의 긴 팔을 이리저리 휙휙 돌렸다. 그리고 점차 팔 돌리는 속도를 높였다. 나중에는 팔이 거의 모터처럼 돌아가서 선생님이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모터, 아니 팔 돌리기를 멈춘 선생님이 물었다. “어때요 승후님?! 하실 수 있겠죠?!” 나는 동태눈으로 선생님을 쳐다봤고 선생님은 꺄하하 하고 웃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선보인 팔 돌리기 동작을, 8단계로 쪼개서 다시 보여주었다. 나는 8단계로 쪼개진 동작을 외우고, 연습하고, 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던 8단계의 동작들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어느새 나는 선생님과 같이 모터를 돌리고(?) 있었다. 너무 어려워 보여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단계를 나눠 조금씩 해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 외국 명언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던 그 말이 처음으로 와닿았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왁킹을 배웠네, 내가.” 나는 선생님에 대해 여전히 잘 몰랐지만, 그가 나누어준 세계를 일부 흡수해 나의 세계를 조금 넓힐 수 있었다.
Q. 분명히 내 것인데, 남들이 더 많이 쓰는 것은?
정답, 이름. 어린 시절 이 문제를 들은 이후로, 남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이름이 조금은 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
‘라온’은 '랍다'에 관형사형 어미인 '-은(ㄴ)'이 결합된 단어다. ‘랍다’는 ‘즐겁다’는 뜻을 가진 옛말이니, ‘라온’은 ‘즐거운’이라는 뜻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작은 연습실의 문을 열며 라온쌤에게 인사를 할 때. 그러니까 입안에서 라온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그 소리를 뱉고, ‘라온쌤~’하는 나의 말에 선생님이 언제나처럼 반겨주고. 10시간 동안 앉아 있느라 굳어버린 몸을 쭉쭉 눌리며 스트레칭을 하고. 숨이 찰 때까지 춤을 출 때. 나는 저절로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단어가 주는 가뿐한 감각을 온전히 느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당연하게 이어지던 수업에 공백이 생겼다. 난 갑자기 백수가 되었고, 생활비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수업을 잠시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선생님은 한 뮤지컬에 캐스팅되었다.
선생님이 맡은 역할은 뮤지컬 <외쳐 조선 : 스웨그 에이지>의 순수라는 역할이었다. 하루는 뮤지컬 제작사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선생님의 캐릭터 포스터가 올라왔다. 내가 아는 라온쌤은 항상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손톱을 뾰족하게 갈아 화려한 네일아트를 하고, 힙한(?) 옷차림으로 춤을 추던 모습이었는데…… ‘순수’로서의 선생님은 포스터 안에서 긴 머리를 하나로 쪼매고, 바지 한복을 입고, 한 손엔 부채를 들고,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했다가 갑자기 결심하고 말았다. 순수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오랜만에 대학로를 찾았다. 나는 객석의 꽤 좋은 자리에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1막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머리를 질끈 묶은 무사가 하회탈을 쓰고 나타났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순수고 라온쌤이라는 걸.
공연을 보기 전엔 몰랐는데 순수는 굉장히 과묵한 무사(?)였다. 절대로 말수가 적지 않은 우리 선생님이 과묵한 무사라니. 그래서일까 나는 순수가 너무 낯설었다. 그런데 순수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그 어색함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배우들이 넘버에 맞춰 다 같이 군무를 추는 장면에서 순수의 존재감은 강했다. 선생님은 정말 박력 있고 멋있고 힘이 넘치는구나. 그리고… 역시 팔다리가 정말 길구나.
순수와의 낯가림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는데, 2막에서 다시 순수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왔다. 묵묵하게 무술만 하던 순수가 말을 한 것이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순수는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목소리가 담담한데도 처절했다. 나는 라온쌤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박자를 크게 세는 목소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목소리, 혹은 사담을 나눌 때의 목소리. 하지만 극장에서 들은 목소리는 내가 알던 그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지만 집중하게 되는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라온쌤은 내가 살면서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사람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이다. 같은 내용을 수십 번 설명하는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고, 유쾌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고, 가르치지 않는 날엔 배우는 사람이고 연습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춤을 가르치는 건 그의 세계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는 대극장 홀을 목소리 하나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컬 배우고, 내가 알지 못하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계절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또 지하 연습실로 뚜벅뚜벅 걸어내려 가겠지. 선생님의 널따란 세계에 조그만 돗자리를 펴는 마음으로. 그러면 선생님은 돗자리 위에서 차 한 잔을 마시는 대신, 길고 긴 팔다리를 휘두르며 춤을 가르쳐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