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색채가 빚어낸 고요한 여백

붉게 타오르는 교토의 가을 창 너머, 나를 덜어내고 비워내는 연습

by 이틀

작은 틈으로 새어 들던 빛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그 너머의 세상은 여전히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세 번째 챕터인 '창; 틈으로 본 세상'은 그 머뭇거리던 갈망이 본격적인 '해방감'으로 표출되는 단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을 외부와 나를 단절시키는 장벽이라 생각하지만, 이 여정에서 창은 세상과 나 사이에 적절한 '여백'과 안전한 거리감을 부여해 주는 고마운 매개체입니다. 창이라는 투명한 막은 두려운 외부의 자극을 일차적으로 걸러주어, 우리가 주눅 들지 않고 외부 세계에 능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용기를 줍니다. 또한, 창은 외부의 불편함이나 소란은 가린 채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만을 선택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선택적 시야'를 가지게 해 줍니다.


이 단절이자 연결인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비워낸 내면을 다채로운 경험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우기 위한 능동적이고 아름다운 선택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선의 거대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순간이 바로 일본의 교토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 이 두 개의 연작 사진입니다.



첫 번째 걸음 : 두려움을 품고 나아가다.

2024 교토26.jpg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속도를 내어 달리는 전철의 정면 창을 마주하고 섰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아주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전 사진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초록'과 '파랑' 계열의 단조롭고 차가운 색감이 주변을 서성입니다.


이 풍경 속 초록빛은 챕터 '창'의 이전 사진들에서 느껴지던, 외부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이어옵니다. 창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해방감을 온전히 껴안기에는 아직 내면의 떨림이 남아있는 상태죠. 아름다운 풍경으로 나아가는 철로가 선명히 보임에도 시선은 중심보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과 차가운 색조에 안주하며 머뭇거립니다. 풍경은 아직 저 멀리에 있고, 나는 그것을 찾아 헤매는 이방인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움을 품은 상태로 점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걸음 : 붉게 타오르는 해방의 품

2024 교토27.jpg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기차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시선을 옆으로 넘기는 찰나, 시야를 방해하던 차가운 색감은 마법처럼 사라지고 풍경이 압도적인 크기로 다가옵니다. 붉은빛과 노란빛의 잎들이 프레임 전체를 빈틈없이 가득 채운, 그야말로 다채롭고 강렬한 색채의 세상으로 완전히 넘어온 것입니다.


전철이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나의 시선은 불안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내고 강렬한 색만을 뿜어내는 생동감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것은 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두려움을 긍정적인 갈망으로 승화시키고, 점차 능동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시야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두려운 곳이 아니라, 내 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색들의 집합체입니다. 외부의 불편함을 가리고, 오직 이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정수만을 선택적으로 바라보겠다는 나의 의지가 이 붉은 단풍의 파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순간, 창은 완벽한 '해방의 통로'이자,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진들 사이에 문장 하나를 나침반처럼 남겨두었습니다.


"창은 나를 훔쳐보던 세상의 시선을 막아주었고,

가장 완벽한 색채의 조각만을 건네주었다."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_내지v537.jpg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창은 세상의 소란과 불편함은 가린 채, 내가 간절히 원하던 가을의 정수만을 걸러내어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그 완벽한 색채의 조각들을 가만히 응시하며, 내 안을 꽉 채우고 있던 불안과 강박을 하나둘 밀어내고 서서히 고요한 빈자리를 만들어갔습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쥐고 있으려 했던 무거운 마음들이 저 붉은 단풍 속으로 흩어지고, 비로소 내면에 맑은 '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이제 고통스러운 직면이 아니라 나를 아름답게 비워내는 능동적인 ‘선택’의 과정이 되었습니다.


이 연작 사진을 기점으로 사진집의 페이지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들로 장식됩니다. 색은 더욱 주관적이고 강하게 나타나며, 시선은 더욱 과감해집니다.


이러한 시각적 호흡의 거대한 흐름은, 단조롭고 안전한 ‘안주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 창이라는 용기 있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 너머의 다채로운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바라보겠다는 나의 다짐입니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 속으로 뛰어든 시선은, 무언가를 억지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을 마침내 내려놓고, 세상의 눈부신 색채들을 통해 기꺼이 나를 비워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찬란한 시작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의 세 번째 챕터 '창'에 배치된 사진의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8년의 기록을 비워내고 100여 개의 사진으로 채운 저의 첫 사진집에는, 브런치에 다 담지 못한 더 깊은 사진들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너머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종이의 질감과,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마주하는 '틈'의 여정을 소장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집 <틈; 채우기 위해 비워낸 여정들> 구매 안내

https://linktr.ee/2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