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닦이지 않는 얼룩같은거
(물음표, 쉼표, 느낌표)
- 닦이지 않는 얼룩같은거
오늘은 정겨운 분들과 만나서 식사를 했습니다. 옛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맛도 분위기도 정겨웠습니다. 저도 주변 사람들도 다소 어수선했지만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힘들고 어떨 때는 아슬아슬했던 그런 이야기들이죠. 지금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삶의 한 자락을 꺼내 먹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는 양철 쓰레트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처럼 처량하고 약간은 불쌍한 이야기인데, 지금에 와서는 그런 이야기도 추억이되어 즐겁게 말하고 듣게됩니다. 이 겨울에 봄처럼 풀린 오늘 날씨마냥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백석 시인과 그의 시에 나오는 나타샤를 이야기하고, 거기에 딸려나오는 길상사와 법정스님을 이야기하고, 법정 스님의 제자가 되신 덕현스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술자리에 덕현 스님의 가족이 있었네요. 그리고 그 스님의 친동생분은 오늘 술자리 다른이의 친구였고 이러저러한 사연들이 세상좁다는걸 다시금 느끼게합니다.
또 다른 분인데 스님이 되려하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우리가 아는 어떤이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모임의 전체 주제어는 ‘하릴없이’와 ‘주섬주섬’ 이었습니다. 하릴없이는 형용사이고 주섬주섬은 부사인데 명사가 아닌 꾸미는 단어가 주제가 되는 재미를 느꼈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술집에 앉아 백석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생략 -
여기서 마가리는 오두막이라는 북쪽 사투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서 다시 시를 읽습니다.
심야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한 가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칼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 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오래된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지금도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칼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자그마한 탁자 위
어쩌다 흘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맵고 아린 순간, 순간들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은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끝 -
시에 나오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하다"는 말투가 시니컬하면서도 툭 던지는 느낌입니다. 추억이란 게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고 별거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이와 함께했던 일상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이니까요.
그리고 "어쩌다 흘린 김치국물 같은 거"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거”라는 문구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흘러가는 일상들이, 사소한 순간들이 나의 삶이었고, 누군가가 나에게 남긴 자국 같은 거겠죠.
먹다가 흘린 김치국물이 탁자에만 배는 게 아니라 제 기억 속에 잘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이 돼서 남게 됩니다. 맵고 아린 순간은 추억 속에도 있지만 지금도 진행 중이겠죠. 그게 삶이니까요. 저도 누군가에게 얼룩이 되고 김치국물이 되었으려나요.
맵고 아린 순간들은 나름 괜찮은 거 같아요. 고추나 마늘이나 겨자처럼 미각과 감정을 자극하죠.
그래서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ps.
백석시인과 나타샤는 무슨 인연이었길래 평생을 잊지못하고 애뜻한 마음을 안고 살게되었을까요.
또 나타샤였던 여인은 요정을 하며 벌었던 길상사 부지를 법정스님에게기부하고, 덕현스님은 법정스님에게 깨달음을 얻어 기어코 제자가되어 길상사 주지를 하게되는 그런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같은 인연으로 엮여있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