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과 페티시즘

- 수선화와 벚꽃

by 하늬바람

(물음표 쉼표 느낌표)


나르시시즘과 페티시즘

- 수선화와 벚꽃



출근길에 수선화들이 인사를 합니다.

너무 예쁘고 수줍어하는 느낌입니다.

수선화의 영어이름은 나르키소스 또는 나르시서스(Narcissus)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소설로 나르시시즘을
이 꽃 이름에 붙여버렸습니다.

수선화와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키소스(Narcissus)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자기애와 자아도취를 상징합니다. 그리스인들이 그 당시에 만든 그 많은 상징, 신화, 비유 같은 것들을 보다 보면 세상과 인간에대한 이해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날리고 있는 벚꽃은 온 세상을 우아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수선화가 나르시시즘이라면 벚꽃은 페티시즘(fetishism)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벚꽃은 단순한 꽃에 그치지 않고 문화와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도 하나의 상징이 돼가고 있습니다.

(아이패드로 그려봄)


화려하게 잠깐 피었다 지는 꽃 특성상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싶다는 강한 감정의 상징이자 이상화된 이미지,


벚꽃은 일종의 미적 페티쉬가 돼버린듯합니다.


그리고 감정의 촉매역할도 합니다. ‘벚꽃엔딩’이나 ‘봄날은 간다’ 같은 노래는 감정을 불러내는 스위치처럼 작동하죠. 페티쉬(fetish)나 페티시즘이 정신분석학에선 성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더 큰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 하겠습니다.



나르시시즘으로 다시 돌아가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그린 그림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키소스’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어 있는 장면과, 그를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에코가 곁에서 바라보는 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워터하우스 특유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는 버전이 여러 개 있긴 한데 대표적인 건 이겁니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피우는 것을 도와준 괘씸죄로 '에코'에게 남의 말 가운데 마지막 음절만을 반복하는 무서운 저주를 내리고, 이로 인해 에코(메아리)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만 그 말을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나르키소스에 절망해 복수의 여신에게 나르키소스가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달라고 빌게 됩니다. 그래서 나르키소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취해 물에 빠져 죽고 그 자리에 수선화가 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수선화의 영어이름이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때서 나르시서스입니다. 수선화의 꽃말이 자기애, 자아도취, 자존심, 고결이 된 이유입니다.


이 그림을 설명한 작가는

나르시시즘을 ‘자아 감각의 인플레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괜찮은 표현인 듯합니다.




벚꽃 페티시즘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의 감성에는 이미 벚꽃이 어떤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드라마나 노래, 애니에서 벚꽃은 사랑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장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과장되어 묘사되니 욕망과 감정이 집중된 상징적 대상, 즉 페티쉬입니다.

(산책길에 벚꽃을 올려다보며 찍은 사진)


몇 년 전에 스페인에 갔을 때 주변 사진을 찍었는데 여인들 등이 자연스레 찍혀있었습니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는 이름처럼 워낙 뜨거운 기온이기에 여성들이 주로 끈나시라 불리는 시원하게 등이 드러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 사진을 보고 주변 어떤 분이 ‘등’에 대한 페티쉬가 있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냥 농담으로 넘기 긴 했는데 그 나라에서 찍은 사진에 워낙 그런 느낌이 많긴 합니다.

그런데 그 지적을 했던 분이 다음에 스페인을 다녀오더니 똑같은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쫓아낸다)’ 고 하더군요. 안 좋은걸 보고 배웠다 뭐 이런 뜻인데.. 제가 그랬죠. 청출어람입니다.

페티쉬는 이처럼 신체의 특정부분인 다리, 등, 발에 집착하거나, 어떤 물체나 물건을 대상으로 욕망과 감정이 집중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꼭 병적인 것은 아니고 인간에게 일정정도 어떤 형태로든 내재되어있다고 봅니다.



나르시시즘의 대표작품으로는 얼마 전 독후감처럼 여기에 썼던 ‘위대한 게츠비’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개츠비는 사랑조차도 자기 서사의 일부로 만듭니다. 데이지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그가 꿈꾸는 삶과 성공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즉 그는 타인을 사랑한다기보다, 타인을 통해 완성되는 ‘자기 이야기’를 사랑합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 했든 표적을 잃고 날아간 화살들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

페티시즘의 느낌이 나는 문학이 뭘까 생각해 보니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의 몸은 점점 인간의 육체라기보다 식물적인 존재로 변해갑니다. 이 과정에서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투사된 대상이 됩니다. 특히 주변 인물들이 그 몸을 바라보는 방식은 일종의 페티쉬입니다. 작가가 일부러 채식과 식물, 여성을 어떤 상징으로 묶어놓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반대에는 폭력, 가족, 억압제도 등이 읽히니까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도 패티시즘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건물에대한 미적집착이 큰 줄거리이니까요.



나르시시즘과 페티시즘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인간의 욕망과 자기 인식이라는 공통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즉 나르시시즘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사고하고. 페티시즘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상대방 전체가 아닌 특정한 부분 또는 어떤 물건 같은 거나 상황이라는 거죠.


수선화를 나르시시즘으로, 벚꽃을 페티시즘의 상징으로 표현하다 보니, 이런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르시시즘과 페티시즘의 사랑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비극적 결말이겠죠.


나르시시즘이나 페티시즘은 모든 인간에게도 어는 정도 있을 터인데 내 안에 있는 것들은 어느 정도 일지 궁금하긴 합니다. 그 선을 넘어선 사람들이 있기에 이 개념이 만들어진 건지, 원래 인간의 욕망 속에 적당히 다 가지고 사는 건지도 생각해 봅니다.


(어둑어둑해져가는 시간에 찍은 벚꽃나무)


ps.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 꽃을 너무 좋아하고 귀하게 여겨 한양 집 앞뜰에 곱게 심어놓고, 그림도 그리고 했다는데 나중에 제주도 귀향 가서 보니 제주도에는 흔하디 흔한 꽃이어서 여기저기 핀 걸 보고 그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제주도에 있는 추사 유배지 기념관 가시면 그런 사연으로 그 주변에 많이 심어놓았습니다. 지금 만발해 있겠네요…


ps2

나르시즘, 페티쉬, 그뫄 관련된 꽃들 등둥 못다한 야야기는 다음에 꼭 더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