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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May 15. 2023

전자회로(電子回路)를 그리듯

우리가 늘 가까이하면서도 어려워하는 것들은 많은 종류들이 있으나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글을 시작하겠다.

     

흔히 마라톤에서 가장 힘든 코스가 어디냐고 물으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42.195 km의 장거리 중 마지막 지점도 아니요, 중간 지점도 아니며, 언덕길도 아니다. 그에 대한 답은 안방에서 거실을 지나 운동화를 신기까지의 코스라고 한다.

     

그만큼 시작이 어렵다는 말인 것으로 해석이 된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데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30 cm에 불과하였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글을 쓰는 데는 첫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제목을 정하는 작업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즉 제목과 첫 문장을 썼다면 반절의 완성이 된 셈이다.

     

나는 문예창작과는 물론이요, 국문학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위 골수 엔지니어에 속한다. 전자특성화공고에서 전자회로와 장비 만지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ICT 산업에 몸담고 있으니 가히 평생을 전자, 전파, 네트워크 분야에서 일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항상 마음 한 곳에는 글에 대한 관심과 메모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요,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틀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매일 쓰고, 매일 가다듬고, 매일 원고를 기고하는 일은 계속되어 지금도 글을 쓰는 기쁨을 향유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에게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전자회로를 그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많은 소자가 실오라기 같은 선으로 연결되는 작업이었다. 그 많은 선들 중에 단 하나만 잘못 연결되어도 장비는 동작불능 상태가 된다. 그런 면에서 글은 오히려 인자하고 여유로우며 관용을 베풀 줄 안다.

     

잘 쓰인 글은 전자회로 기판에 잘 짜인 회로를 보는 것 같다. 정교하고 오(伍)와 열(列)이 정확하게 맞으면서도 효율적으로 동작을 하는 전자제품이나 서론과 본론, 결론이 잘 쓰인 글은 참으로 많이 닮은꼴을 하고 있다.

     

전자회로가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면 글은 사람의 영혼에 평화를 주고 사상이나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된다. 4차 산업시대에 ICT 전문가로 살면서 수없이 쏟아지는 동영상, 그래픽 정보와 애니메이션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텍스트가 무슨 효과가 있으랴마는 진정한 울림과 깊은 각성의 시간은 오히려 글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마치 내일이라도 없어질 듯한 책들은 앞으로도 사람들의 손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아름답게 나이 듦의 뒤편에는 항상 아름다운 글이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40년 전 회로를 그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하얀 지면에 글을 쓴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글로 남기기 위함도 아니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더더욱 아니다.

     

자아의 세계에 빠져 나의 생각을 지면에 쏟아버릴 때 나는 또 다른 방향과 영역의 채움 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기 위해서는 비우라고 하였던가? 그렇다. 어제, 오늘 쌓인 생각과 감정은 이 지면 위에 비우고 지금부터는 또 다른 아름다운 감정을 벽돌 하나하나를 쌓듯 차곡차곡 쌓으리라.

     

나는 나만이 창작한 회로를 오늘도 그린다. 그 회로가 동작이 될는지, 아니면 영원히 전기를 넣어보지 않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작은 부품들이 모여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하는 회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순하되 꼭 필요한 회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학에서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학을 넘어 공학을 전공한 나는 이제 문학도 하나의 공동체 성격이라는 것을 조심스레 이야기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총량(總量)의 법칙이 있듯이 과학과 문학 또한 별개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별에서 같은 에너지원으로 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정말 황당한 이론이라고 반박을 할 것이며, 순수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면 더욱 부정의 강도는 클 것으로 예측한다.

     

하지만 이론상 음악, 문학, 회화, 경제, 사회, 기술 등은 결국 피라미드의 꼭지 점에서 만나게 된다. 단 서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신은 이미 그런 설계도대로 이 땅의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오늘도 정교한 회로를 그리듯 선 하나하나에, 획 하나하나를 긋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한다.

향기 나는 글은 아니라도 나는 마음의 평화와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였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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