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는 낡은 상자 하나가 있다. 누가 봐도 그저 오래된 과자 상자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보석함보다 귀한 것이다.
그 안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다. 어머니가 스무 살 무렵에 찍은 사진인데, 웃는 모습이 지금의 내 얼굴과 닮아 있어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옆에는 중학교 시절 읽던 책에 끼워두었던 책갈피가 있다. "모든 순간이 꽃이었다"라는 문장 하나가 적혀 있는데, 그때는 몰랐던 그 말의 의미가 이제는 너무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접어둔 편지 한 통. 첫사랑이 수줍게 건넸던 그 편지는 이제 종이가 누렇게 바랬지만, 거기 담긴 서툰 마음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에 내놓으면 한 푼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어떤 금반지보다 더 빛나는 보석들이다. 진짜 보석은 빛을 반사하지만, 이 작은 것들은 마음을 비춘다. 그리고 그 빛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이런 마음의 보석상자를 가지고 싶어 할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증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빠르게 흘러가고, 기억은 쉽게 희미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잡고 싶어 한다.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증거들, 그것들이 있으면 "그때 내가 정말 그랬었지"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
그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책을 읽던 교실의 햇살이 느껴지고, 설레던 십 대의 떨림이 되살아난다. 그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일깨워주는 나침반 같은 것이다.
힘든 날에는 그 상자가 더욱 소중해진다. 세상이 차갑게 느껴질 때,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 그 작은 것들이 속삭인다. "넌 사랑받았어. 넌 아름다운 순간들을 살았어.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네 안에 있어." 그 위안은 어떤 말보다 따뜻하고, 어떤 위로보다 깊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보석상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주는 닻이 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물질이 아닌 마음으로 모은 보석들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진정으로 우리 것인 무언가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것들은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 바로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진짜로 풍요롭게 만든다.
화려한 보석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마음의 보석은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은밀한 기쁨, 혼자만의 따뜻함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선물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결국 그런 것들이 아닐까. 사랑했던 순간들, 소중했던 인연들, 가슴 깊이 새겨진 감동들.
오늘도 나는 그 낡은 상자를 꺼내 천천히 열어본다. 그리고 조용히 미소 짓는다. 세상 그 어떤 부자보다 내가 더 부유하다는 걸, 이 작은 보석들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당신의 서랍 속에도 그런 상자 하나쯤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미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