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에 스며드는 물음

우리는 왜 노년에 책을 펼치는가

by 이정호

인생은 강물과 닮았다. 유년은 산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작은 물줄기처럼 맑고 경쾌하다. 청년기가 되면 강은 넓은 들판을 만나 거침없이 달린다. 직장, 군복무, 결혼, 육아, 승진 이 모든 것은 강물이 바위를 부딪히며 내달리는 소용돌이 같다.


그런데 중류에 이르면 강의 흐름은 점차 느려진다. 물길은 넓어지고, 수면 아래 깊은 여운이 스민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묻는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라고.


장년의 삶은 분주함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아침마다 달리는 지하철처럼, 우리는 시간과의 사투를 벌인다. 월급날의 계좌 숫자, 아이의 학교 성적표, 회의실의 프로젝트 마감일 이 모든 것이 현대인의 의식주를 대신한다. 여기서 인문학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보다는 업무 보고서 작성법이, 니체의 초인 사상보다는 주택 대출 이자가 급하다.


그러나 이 '달리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어간다. 한 직장인의 일기가 이를 증명한다. "퇴근길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이게 정말 나인가?"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이름의 경주는, 결국 "왜 달리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덮어버린다.


50대 중반의 K 씨는 최근 서재를 꾸몄다. 자녀가 독립하고,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을 권유했다. 어느 날 문득 서랍 속에 잊혀 있던 대학 시절 철학 교재를 꺼냈다. 헤겔의 변증법이 적힌 페이지 여백에는 젊은 날의 낙서가 남아 있었다. "세상은 정말 정반합으로 움직일까? “


노년에 이르면 시간의 질감이 달라진다. 과거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되고, 미래는 안갯속 등대처럼 희미해진다. 이때 인문학은 거울이 된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사실 "내 인생은 정의로웠는가"를 돌아보는 일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허무를 읽어내는 눈은, 이미 수십 번의 좌절을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인생은 앞으로 살면서 뒤로 이해한다." 중년의 인문학 탐구는 마치 강이 바다로 흘러가기 전, 자신이 지나온 골짜기와 협곡의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다.


70대 노신사가 암 선고를 받은 날, 병원 창가에서 『마의 산』을 읽었다. 토마스 만의 이 소설은 결핵 요양원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한다. 그는 이제야 이해했다. 청년기에 이 책을 덮었을 때 느낀 권태가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변형이었음을.


인문학적 사유의 궁극적 지점에는 '유한성의 각성'이 있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아는 존재다. 철학적 사고는 이 충격을 예술로, 사유로, 문장으로 승화시킨다.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에서부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까지, 인류는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오히려 문명의 불꽃을 피워왔다.


노년의 독서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온 날들의 의미를 모으는 정제 과정이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인생의 결산기에 선 이들은 인문학 텍스트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와 자신의 개별적 삶을 잇는다.


인문학과 철학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농부가 밭고랑을 갈며 생각한 '정의', 공장 노동자가 교대근무 중 떠올린 '자유' 이 모두가 철학의 씨앗이다.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논쟁하던 철학자들, 조선의 서당에서 『논어』를 읽던 선비들, 오늘날 지하철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는 직장인까지. 삶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의문을 품는다.


다만 그 질문의 깊이가 달라질 뿐이다. 인문학적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간다는 것이 단순한 생존 이상임을 일깨운다. 철학적 사고는 일상의 틈새에 영원성의 빛을 비추는 프리즘이다. 어느 노년의 일기장에 쓰인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책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한다. 첫 번째 항해가 먹고사는 법을 배우는 여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왜 살았는지를 배우는 여정이다. “


※ 이 에세이는 일상의 서사를 통해 인문학적 성찰의 보편성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계절의 변화, 강물의 은유, 일상적 이미지들을 활용해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했으며, 가상의 인물 에피소드를 배치해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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