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는 일은 꽤나 값진 일이다. 강의나 심사, 기고, 평가 같은 지식노동은 말 그대로 ‘머리를 써서’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이다. 과거에는 이를 통해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자부심도 느꼈다. 나 역시 20여 년 전부터 이런 일을 시작했고, 당시 시간당 10만 원 안팎의 강의료가 꽤 큰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강의료와 심사료는 거의 변함이 없다. 물가가 오른 만큼 체감되는 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행정 절차와 자료 준비에 들어가는 시간은 몇 배나 늘어났다. 한 시간짜리 강의 뒤에 숨은 PPT 제작, 이력서와 각종 증빙서류 작성, 먼 길을 오가는 교통비와 시간까지 고려하면 순수히 노동에 대한 대가로 돌아오는 금액은 처참할 정도로 낮다.
최근 한 지방대학에서 1시간짜리 특강을 요청받은 일이 있다. 졸업생들을 위해 ‘꿈과 희망을 전해주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준비했다. PPT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 증빙자료를 구비하는 데 걸린 시간, 그리고 왕복 6시간의 이동까지 합치니 강의 1시간을 위해 10시간 이상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돌아오는 보수는 약 13만 원 남짓. 밥값이나 차비도 따로 지원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시급으로 따지면 정말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졸업생들이 감동받고 진로에 힌트를 얻었다는 후기가 있어 스스로 ‘나름 보람이 있었다’며 위로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지식노동이 반복될 때마다 드는 허탈함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때 ‘전문직’이라 불리며 받았던 존중이, 이제는 ‘위원회 명목의 자문’이나 ‘형식적인 외부 전문가 초빙’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책임 소재를 외부로 분산하기 위해 위원회를 열고, 그 자리에 전문가를 초청한다. 정작 결정 권한과 책임은 기관이 쥐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단지 의견만 제시하는 장식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인력풀에 등록되어 있으면 연락을 피하기도 쉽지 않아, 결국 몇 푼 되지 않는 보수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명예롭지 않느냐”며 겉만 보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낮은 보상과 늘어나는 업무, 복잡해지는 행정 절차 사이에서 ‘내가 이 정도 대우를 받으며 활동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반면 몸 쓰는 분야의 전문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화장실이나 배수관이 막혀 전문가를 불러 문제를 해결하면 부르는 값이 30만 원, 50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불만을 토로하기도 어렵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상 자체가 불가능해지니, 이들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인정받는다. 누수나 누전 등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일수록 몸 쓰는 전문가의 가치는 몇 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시장 논리에 철저히 기반해 ‘부르는 게 값’이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이 있다. 몸 쓰는 노동과 머리를 쓰는 노동을 단순히 비교해 누가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식노동이 오랜 세월 제대로 된 평가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혹은 책임 회피용 ‘보여주기 식 초청’에 이용당하면서 그 가치가 빛바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화이트칼라, 블루칼라의 구분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전문성, 그리고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지식노동의 대가는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뒤처졌다고 느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마도 깊은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지식노동’을 ‘눈에 보이지 않는 일’로 치부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고, 없어도 당장 삶이 멈추지 않는다고 여기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술, 아이디어, 미래를 설계해 주는 지식노동자들의 역할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는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문제 발생 즉시 ‘삶이 멈춰버리는’ 일이 아니므로 가치를 낮게 매기는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
하지만 지식노동이란 결국 사회가 더 오래,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돕는 길잡이 같은 존재다. 이런 활동이 지금처럼 ‘열정 페이’ 수준에 머문다면, 결국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가 손해를 본다. 전문가들이 연구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가 없어지고, 경제적 제약 때문에 지식 공유를 기피하게 되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내가 몸담아 온 이 지식노동의 영역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기관과 기업, 그리고 사회 전체가 지식노동의 핵심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단지 ‘있어 보이기 위한 전문가 초청’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언과 책임을 나누는 파트너십’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또한 지식노동자들 역시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관행적으로 굳어진 낮은 보수와 불합리한 절차를 지적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협상도 해야 한다.
아울러 몸 쓰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대가를 받는 것’처럼, 지식노동자들도 ‘필요하다면 합당한 대우를 받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 다른 분야이지만, 가치가 균형 있게 인정받을 때 사회는 훨씬 다양하고 건강해진다.
지식노동자는 사치품이 아니다. 고도의 지적 역량을 다듬어 누구에게나 쉽게 설명하고, 함께 미래를 고민하며 나아가는 이들은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다. 지금이 20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지식노동의 가치를 바로 세울 가장 중요한 시기일지 모른다. 보람과 자부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오길 바란다. 더 나아가, 그 길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히는 데 작은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